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김달진은 1929년 11월 ≪문예공론(文藝公論)≫에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 1935년 ≪시원(詩苑)≫, 1936년 ≪시인부락(詩人部落)≫, 그리고 1947년 ≪죽순(竹筍)≫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연을 관조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빼어난 서정시집 ≪청시(靑柿)≫(1940)를 출간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문단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은둔적 생활로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으나, 1983년 ≪올빼미의 노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명맥을 이어 갔다. 김달진은 60여 년의 시작 활동 기간 동안 노장적 무위자연과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자신의 시 세계를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지켜 온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 창작과 함께 불경과 동양 고전의 번역을 통해 얻은 종교적 사유를 평생 동안 지속한 학자이기도 하다.
<청시(靑柿)>는 김달진의 시 세계를 열고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한다.
시에서 시인은 가벼운 바람이 불고 감나무의 가지가 흔들리는 뜰 한가운데 서서, 감잎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덜 익은 열매를 바라본다. 그 작은 뜰은 대수롭지 않은 장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곳은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이다. 그 이유는 “六月의 꿈”이라는 특별한 시어 때문이다. 유월의 꿈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인데, 시인은 그것을 아직 익지 않은 열매에 비유하고 있다. 익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완벽하지 않지만,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가 된다. 자연의 원리는 인위적인 힘이 없어도 성숙해 간다. 오히려 인위적인 것이 없어야 온전한 제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시인은 그 익지 않은 열매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가닿게 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더 나아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익지 않은 열매의 현상적 모습으로 존재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이 시는 김달진이 생각한 세계의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달진의 시가 지닌 맑고 순연한 서정적 세계는 시인의 우주적 시선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꾸미지 않는 무위자연의 세계와 그가 스스로 지켜 온 은자적 삶은 이 세계의 본질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태도가 빚어낸 빛나는 것들임이 틀림없다.
200자평
김달진은 60여 년의 시작 활동 기간 동안 노장적 무위자연과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시 세계를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지켜 왔다. 동양적 사유를 미학적 근간으로 삼아 자연 형상을 그리고 있는 김달진의 시를 감상함으로써 맑고 순연한 서정적 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은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 시의 정신주의적 세계를 확고히 한 시인이다.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 7월호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잡영수곡(雜詠數曲)>이 실리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줄곧 사상과 관념과는 거리가 먼 시를 썼다. 민족의 현실 앞에 절망하다가 우연히 찢어진 벽지 사이의 초벌 신문지에서 ‘불(佛)’ 자를 발견하고 입산을 결심, 1934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김운악(金雲岳) 스님을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유점사 찾는 길에>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1935년 시 전문지 ≪시원(詩苑)≫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나의 뜰> 외 여러 작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35년 백용성(白龍城) 스님을 모시고 함양 백운산 화과원(華果院)에서 수도생활을 했으며, 이듬해 1936년에는 유점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참가해 11월 창간호에 <황혼>을 발표하고, 1938년에는 <샘물>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1940년 9월에는 관념이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서정의 세계를 담은 첫 시집 ≪청시(靑柿)≫를 청색지사에서 발간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이광수의 권유로 잠시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했다. 1954년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출강하면서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출간했고, 이때부터 30여 년간 고전과 불경 번역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다 1989년 6월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한국한시≫ 1∼3권과 ≪한산시≫가 나란히 출간되었으며, 1990년부터 인간이 구현해야 할 정신주의 영역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달진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엮은이
여태천(余泰天)은 197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김수영 시의 시어 특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국외자들≫(2006), ≪스윙≫(2008),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2013), 비평서 ≪김수영의 시와 언어≫(2005), ≪미적 근대와 언어의 형식≫(2007), 편저 ≪춘파 박재청 문학전집≫(2010), ≪이성선 전집 2·산문시 기타≫(2011) 등을 비롯해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제27회 김수영문학상(2008)을 수상했다.
차례
≪靑柿≫
靑柿
개 짖는 소리
눈
고독한 동무
저녁 햇살
샘물 속의 슬픔
밤길
꿈꾸는 비들기
금붕어
햇볕
湖面
焦燥
山莊의 밤
빗발 속으로
六月
山房
古沼
小景
山居
그 女子의 눈동자
햇볕
失戀
愛人
戀慕
歸路
물속에 빠지는 새
立春
고흔 한때
밤
月光
雨後
秋聲
曇天
枯淡
샘물
曇月
첫겨을의 한낮
熱
돌바위
漂泊者
山峽의 달
故鄕 詩抄
≪올빼미의 노래≫
달밤
들길
꿈길
賤待받는 마음이
기다리는 사람들
낙타 떼
화로 앞에
시름
車中에서
불리어 가는 사람들
時間
囚人
諦念
病
下心
들에 서서
그리는 세계 있기에
靑磁器처럼
午後의 思想 敬虔한 情熱
牡蠣의 꿈
열무우 꽃
古寺
[在滿詩篇 外]
뜰
鄕愁
벌레
속삭임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
唐詩를 읽으며
씬냉이꽃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
숲 속의 샘물을 드려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힌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내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드려다보며
동그란 地球의 섬 우에 앉았다.
-<샘물>, 40쪽.
●
그리는 세계 있기에
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
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
또 깊게,
어둠의 苦惱 속을
파고들어,
모든 才氣와 賢明 앞에
하나 어리석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
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 가는 열매
멀리 바라보면서-
-<그리는 세계 있기에>, 78~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