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했고, 마음은 유자(儒者)이면서 행적은 불자(佛子)이니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으로 생각해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했다.”
1582년 이이(李珥, 1536∼1584)가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의 한 구절이다. 심유적불(心儒迹佛) 네 글자에는 김시습의 숱한 방황과 깊은 고뇌가 모두 담겨 있다. 이이는 김시습의 일생을 자기모순과 자아 분열로 간파한 것이다. 김시습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이자 시대의 이방인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근본 원인은 세계와 마주하기 이전 스스로 자아의 분열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종의 죽음은 여러 해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속이 흉흉하던 김시습에게 모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갑자기 승려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이후 김시습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반생 길 위를 집 삼아 보냈으니, 만수천산이 눈 아래 호사로워라(半生長以路爲家, 萬水千山眼底賖).” 7년 정도의 여행 끝에 견문이 많아지고 지식은 단단해졌지만 몸은 무척 지쳤다. 지친 그를 편안하게 품어 준 곳이 경주, 즉 신라였다. 그는 여기서 7년의 긴 안식을 가진다.
1583년 간행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본 ≪매월당집≫ 권12의 <유금오록>에는 106제 146수의 시가 실려 있다. 금오산에 거처를 두고 있던 시절에 지은 작품들이다.
전체 106제 146수의 시 중에서, 일부 추정을 포함하면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의 풍물이나 생활을 읊은 시는 69제 100수다. 본서는 이중 63제 76수를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경주에서 지은 시는 대부분 포함하되 연작시의 경우 일부만을 실었다. 1465년 한양에서 지은 <금오산을 그리며(憶故山)>(72)와 <시주받은 돈으로 모두 책을 사서 금오산으로 돌아가다(所嚫貲財 盡買圖書 還故山)>(73) 두 수는 당시 김시습의 금오산에 대한 애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뽑아 넣었다. 경주 시절 김시습은 폐허에서 신라를 거니는 시간 여행자였다. 그는 심신이 지친 몸으로 경주를 찾았고, 경주의 빈터와 허물어진 전각, 기운 탑과 훼손된 불상, 그 위에 서려 있는 먼 옛날의 사연들이 그 황량한 속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시습은 오랜만에 심신의 안식을 찾았고, 그 따스한 둥지에서 ≪금오신화≫가 태어났다. 경주를 찾는 이가 이 책을 들면, 550년 전 경주의 풍경과 그 속을 거니는 나그네와 이들 사이에서 빚어진 시경(詩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0자평
어려서 천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24세에 세상을 등지고 방랑한다. 출가해 승려가 되었지만 뿌리 깊이 박힌 유교의 가르침을 버리지 못한다. 자기모순으로 인한 방황과 고뇌 가운데 유독 그의 마음을 끈 곳이 있으니 바로 경주다. 김시습의 시 가운데 경주와 관련한 작품을 엮었다. 시를 읽으며 외로운 천재와 함께 천년 고도 경주를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지은이
김시습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친가 외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다. 외가에서 자라면서 말을 배울 무렵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살 때 “난간 앞에 꽃 웃으나 소리 아니 들리고, 숲 아래 새 울지만 눈물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 구절을 듣고는 병풍의 꽃과 새를 가리켰다거나, 다섯 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許稠, 1369∼1439)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지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여럿 전해 온다. 소년의 천재성은 궁궐 안에까지 들려왔고, 세종은 그를 불러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내성적이며 부끄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과거엔 실패했고 집안은 빈한했다. 유년기의 충만감은 일순 공허감으로 뒤바뀌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곧 재취했다. 평생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18세 즈음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단종의 선위와 세조의 즉위(1455),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사육신 등의 죽음(1456), 단종의 죽음(1457) 등 정치적 격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여러 문헌에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8년, 24세의 김시습은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서른 살 무렵에 경주에 안착한다.
37세(1471)에 경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이듬해 수락산 동쪽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외부 활동과 교유를 자제하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주요 불교 저술을 지었다. 이 시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남효온(1454∼1492)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생육신으로 묶어 일컬었다. 47세에는 잠시 환속해 다시 결혼하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잠시 공부와 시작(詩作)의 방향이 유교로 급격하게 쏠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지 만 10년이 되는 1483년 봄,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남효온이 지은 시에 따르면, 김시습은 육경(六經)과 역사서 등을 싣고 관동의 산수를 돌아다니다가 농토를 얻어 생계를 꾸릴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이후 10년 그의 발걸음은 춘천, 홍천, 인제, 양양, 강릉 등지를 지났다. 오봉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에 머물렀다. 바닷가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 갔다.
1493년, 죽음을 직감한 코끼리가 깊은 동굴을 찾아들 듯이, 이승을 떠날 때가 된 김시습은 백제로 향했다. 무량사(無量寺), 지금은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절집에서 그는 평생 방랑에 지친 영혼을 안식한다.
옮긴이
이승수는 역사의 숲속에 나 있는 문학의 길을 거니는, 사림문로(史林文路)의 산책자다. 경기도 광주에 살며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 몸담고 있다. “모든 이론은 자서전의 편린”이라는 발레리의 말에 동의하며, “지리 공간은 역사의 자궁이자 가정”이라는 듀란트의 말을 좋아한다. 연개소문, 이항복, 유몽인, 김시습, 박엽, 조성기, 김창흡, 박세당, 이덕수, 박문수, 박제가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패수(浿水)와 송화강(松花江) 등 우리 역사와 관련한 북방의 여러 도시와 강과 길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거문고 줄 꽂아 놓고≫,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등의 저서를 펴낸 바 있다. 사마천, 김성탄, 박지원, 이상으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준비 중이다.
차례
선방사 터에서
흥륜사 터에서 2수
황룡사의 큰 불상을 놀리다
연좌석을 놀리다
영묘사 부도에 올라
월성에서 옛일을 떠올리다
포석정에서
오릉에서
경순왕 사당
계림에서
천주사에서 꽃을 보다
안압지 옛터
첨성대에게 묻다
첨성대 대신 답하다
매화를 찾아 2
매화를 찾아 9
매화를 찾아 11
매화를 찾아 14
백률사 다락에 올라
공자 사당
신라 장수 김유신의 무덤에서
빈현루
옛 성터에서
모그내
분황사 무쟁비
동정에서 달을 보며 벗과 마주하다
분황사 석탑
동천사에서 사계화를 보다
남정
봉덕사 신종
불국사에서 2수
김알지의 무덤
선덕 여왕의 무덤에서
월성당에서
지금은 인가가 된 사천왕사 터에서
북천의 김주원 공 집터에서
천룡사의 옛 사연
대로원에서 옛일을 떠올리다
비로자나대불을 뵙다
동산령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다
용장사 경실에서
매화를 심다
황룡동
장미를 심다
잣나무를 심다
소나무를 심다
죽순을 위해 울을 치다
대 가지치기
하얀 꽃뱀
진사 김진문에게
초사를 읽고 3수
상상 주계정에게
설죽
차나무를 기르며
송이버섯을 따다
백률사 계회에
달밤의 옥피리 소리
탑의 돌과 불상으로 다리를 놓은 것을 보고
병봉사에서 매화를 보다 3수
양하
눈 구경
북명사의 모란꽃 5수
그리운 금오산
받은 돈으로 다 책을 사서 금오산으로 돌아가다
병들어 초당에 누워 회포를 적다
열흘 몸져누운 새 가을이 깊어 세월을 느끼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월성에서 옛일을 떠올리다
가래 옻 나무숲서 들안개 피어나니
천 년의 신라 문물 지금도 그대론 듯
사람 일 사라져도 산은 아직 남았으니
꽃 지고 새가 우는 봄 한 철 서글퍼라
낭패 본 남궁에는 가을 잎들 떨리는데
투항한 북악에는 잡초들만 무성하다
아득한 옛일이여 한바탕 꿈 같으니
어부와 나무꾼은 그 사연 모르리라
月城懷古
梓漆扶疏生野煙
千年文物想依然
人非事去山猶在
花落鳥啼春正憐
狼狽南宮秋索索
投降北岳草芊芊
悠悠往事如莊夢
問着漁樵殊惘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