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한국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10년대 김억은 당대의 공리적인 문학관에서 벗어나 정규적인 시의 형식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의 형식을 모색했다. 특히 1916년부터 상징주의 이론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상징주의 시 <오뇌의 무도>(1921)와 <잃어진 진주>(1924)를 번역했으며,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출간했다. 이처럼 상징주의 이론을 도입해 근대적인 시에 관한 전문적인 이해를 형성하도록 했으며, 번역시를 통해 새로운 시형을 모색했고, 나아가 우리 민족에 맞는 시형과 운율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시화함으로써 1920년대 자유시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0년대 이후 해외 문학의 수용 시기에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프랑스·영국·독일 등을 포함하여 8개국 이상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오뇌의 무도≫(1921), ≪기탄자리≫(1923), ≪잃어진 진주≫(1924), ≪원정≫(1924), ≪신월≫(1924) 등 역시집을 출간했다. 자의적이고 내용에 편중하던 번역이 주류를 이루던 상황에서 번역의 내용과 외형이 모두 중요함을 자각하고, 번역 문단을 현대적으로 선도했다.
김억의 번역론에서 가장 획기적이며, 논란이 되어 온 핵심은 ‘창작적 의역’이라는 방법론이다. 전통적으로 번역의 원칙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억은 시가의 말할 수 없는 묘미는 언어미의 어의(語意)·어음(語音)·어향(語響)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미만을 가져오면 그것이 원시의 뜻은 전했을지 모르지만 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의 번역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시의 의미가 아니라 원작에서 발견한 감동을 토대로, 시상을 잡아 창작하는 것이 바로 번역자가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김억은 민요시에 관심을 보이면서 1930년대는 일종의 정형시론인 격조시론(格調詩論)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격조시형이 우리 민족의 정서, 즉 조선 정서를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근대시가 제작되기를 희망했다.
1930년대 초부터는 ‘조선심’과 ‘격조시형’을 내세우면서 유행가 작사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정형 율격이 가장 잘 적용된 작품이 바로 대중가요 가사였다. 민족이 향유할 수 있는 ‘조선적 형식’을 통해 ‘조선적인 정서’, ‘조선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격조시’로 구체화되면서 대중가요 가사 작사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김포몽, 김안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5년 이전 80곡의 유행가 가사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자평
한국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10년대 김억은 서구 문예이론과 문학작품을 번역 소개하고 직접 창조하면서 한국 근대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격조시형의 탐구, 유행가 작사 활동 등을 통해 조선적 형식과 조선심을 토대로 한 근대서정과 리리시즘을 정립했다. 이 책은 김억의 문학관을 확인할 수 있는 시론, 번역론을 뽑아 엮은 것이다.
지은이
김억은 평안북도 곽산 출신으로 아버지 김기범(基範),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호적상으로 1896년으로 되어 있으나, 김억 유족의 말에 의하면 1895년이라고도 한다.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이고 뒤에 억(億)으로 개명했으며, 필명으로 안서 및 안서생(岸曙生), A.S., 또는 본명 억(億)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904년 고향에서 박씨가(朴氏家)의 규수와 혼인했으나, 1930년 중반에 사별하고, 1944년 봄 신인순(辛仁順)과 재혼했다.
1907년 정주군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여 춘원 이광수를 선생으로 만난다. 그를 통해 김억은 투르게네프, 바이런의 시를 알게 되었고, 일본에서 번역된 바이런의 시를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여 춘원에게 보여 주어 칭찬을 받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후 최남선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번역 작품을 투고하기도 했다.
김억은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영문과에 진학했다. 1914년에는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을 실었고, 이후 <야반>, <나의 적은 새야>, 산문시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의 자유시를 발표했다. 또한 개인의 삶과 예술의 일치를 주장하는 <예술적 생활>과 보들레르, 베를렌 등을 통해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시론 <요구와 회한> 등을 ≪학지광≫에 1915∼1916년 계속 게재했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는 시론 <프랑스 시단>(1918)을 발표했는데 ‘음향, 색채, 방향, 형상’ 등을 중심으로 상징주의의 중요한 요소들을 설명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번역과 소개 및 창작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김억은 1916년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이 시절 그는 김소월을 지도했으며, 1922년 문단에 김소월을 처음 소개했으므로 김억과 김소월의 관계는 각별하다 할 수 있다.
≪창조(創造)≫, ≪폐허(廢墟)≫ 등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이외에도 ≪영대(靈臺)≫,≪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고 이후 ≪매일신보≫의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억은 최초의 역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 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냈을 뿐 아니라 광복 전까지 20여 권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시단>(1918), <스핑크스의 고뇌>(1920)를 통해 해외 문학 이론을 수용하고, 아울러 <시형의 음률과 호흡>(1919), <작시법>(1925), <시론> 등을 통하여 개성적 운율과 조선시형을 강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역시론>(1930)과 역시집의 서문 등을 통해 번역과 관련한 자신의 방법론 및 철학을 밝혔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신념하에 우리말의 어감과 어향(語響)에 맞게 번역을 시도함으로써 모국어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특히 ≪오뇌의 무도≫의 번역을 통해 상징시풍을 1920년대 초기 시단에 정착시켰다. 이 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 보급을 위하여 강습소를 열기도 했다.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여, 뒤에 간행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Esperanto Kurso Ramida)≫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가 되었다.
이외 ≪기탄자리≫(1923), ≪신월≫(1924), ≪원정(園丁)≫(1924) 등의 역시집을 통하여 한국 시단에 인도 시인 타고르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1925년 이후에는 전통 지향성으로 회귀하여 한시 번역에 치중하여 ≪망우초(忘憂草)≫(1934), ≪동심초(同心草)≫(1943), ≪꽃다발≫(1944), ≪지나명시선(支那名詩選)≫(1944) 등의 역시집을 출간했다. 또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살려 낸 민요시 제작에 몰두하여 ≪금모래≫(1925), ≪안서시집≫(1929) 등 민요조 서정시집을 출간했고, ‘격조시(格調詩)’라는 이름으로 칠오조 4행의 정형률을 창안하여 장시 ≪지새는 밤≫(1930)을 내놓기도 하였다. 김소월의 시를 ≪소월시초≫(1939), ≪소월 민요집≫(1948) 등으로 편저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광복 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했으며(1953), 다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되었으나(1956), 이후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서구 시 및 시론의 번역 소개와 아울러 시 창작을 병행함으로써 개인 정감의 세계와 서정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한국 초기 시단의 대표적인 이론가, 번역자, 시인이었다.
엮은이
김진희(金眞禧)는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근대 문학 초창기 문학 장(場)의 형성, 식민지 시기 한국 근대문학의 근대성과 탈식민성, 번역과 비교문학 연구, 젠더 연구, 동아시아 지식 연구 등의 주제에 학문적 관심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생명파시의 모더니티≫, ≪근대문학의 장(場)과 시인의 선택≫, ≪회화로 읽는 1930년대 시문학사≫ 등의 연구서와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 등의 비평집이 있다.
차례
藝術的 生活−H 君에게
要求와 悔恨
詩形의 音律과 呼吸−劣拙한 井見을 海夢 兄에게
金素月의 追憶
格調詩形論 小考
詩論
譯詩論
流行歌詞管見
詩集 ≪잃어진 眞珠≫에서
해설
김억은
엮은이 김진희는
책속으로
詩의 飜譯이라는 것은 飜譯이 아님니다. 創作입니다. 나는 創作보다 더한 精力 드는 일이라 합니다. 詩歌는 옴길 수 잇는 것이 아니라 하면 詩歌의 飜譯은 더욱 創作 以上의 힘드는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가 업습니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요 不可能性엣 것을 可能性엣 것으로 맨드는 努力이며 또한 譯者의 솜씨에 가쟝 큰 關係가 잇습니다. 이에는 媒介되는 譯者의 個性이 가쟝 큰 中心 意味를 가지게 되야 詩歌의 飜譯처럼 큰 個性的 意味를 가진 것은 업다고 斷定하랴고 합니다.
―<시집 ≪잃어진 진주≫에서>
素月이는 殉情의 사람은 아니외다. 어디까지든지 理智가 感情보다 勝한 聰明한 사람이외다. 그러고 所謂 心毒한 사람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自然이 事物에 對하여 利害의 주판질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다른 事情도 없는 바는 아니었거니와 이 詩人이 詩作을 中止하고 달리 生活의 길을 찾던 것도 그 實은 詩로서는 生活을 할 수가 없다는 理智에서외다.
―<김소월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