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김영태는 무(無)를 통해 미(美)를 완성하려 한다. 불합리한 힘, 더러움, 권력, 불순물이 제거된 깨끗한 흰 눈과 같은 상태를 시인은 아름다움의 절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미의식 때문에 유령처럼 평생 혼자 겪게 된 적요, 적막이 그의 시 세계 전반에 걸쳐 노정(露呈)되어 있다. 무화에 대한 갈망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 그의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무화와 갈망에 대한 열정도 궁극에는 미의식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그는 미의 근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김영태 시인은 구석을 편애한다. 중심보다는 ‘쬐그맣게’ 적은 구석의 이름을 편애한다. 구석은 얼룩과 닿아 있다. 김영태가 생각하는 생의 질량은 얼룩이다. 생의 궁극도 얼룩이다. 얼룩은 찰나이고 직관의 영역이다. 끝장난 얼룩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김영태는 존재의 무게감을 궁극적으로는 무로 보았다. 생의 궁극, 무에 대한 인식을 향기 혹은 얼룩이라는 표상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김영태의 시 <메뉴>에는 빵점, 빵, 빵떡에 관한 사유들이 드러나 있다. 빵과 빵점과 눈은 미물을 표상한다. 조금씩 뜯어 먹으면 없어지는 것이 빵인 것처럼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 “조그만 미물이 지구에서 없어진다면” “빵점화”된다면 그다음에 남는 것은 풍경이다. 미물로 분류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미물이기에 생도 존재도 생사의 사이클에서 “메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원리는 모든 생이 빵점화 혹은 영점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눈처럼 뜯어 먹어 없어지는 빵처럼 되어 가는 것이다. 예외는 없다. “누가 뜯어 먹다 만 빵 같은 나”라고 시인은 스스로를 인식한다.
김영태는 얼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구석, 쬐그맣게로 표현되는 얼룩에 대한 그의 편애는 빛나는 것을 무화시키는 의식으로 연결된다. 그에게 별은 “빵떡”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빵떡” 같은 별을 향해 가고 있는 눈 가린 조랑말처럼 시인은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예민하게, 맹목적으로 다가간다. 과시하지 않는 아름다움, 목소리가 크지 않은 아름다움을 그는 쬐그맣게, 유별나게, 예리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아름다움은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향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적 에피파니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또한 시선과 연결되기도 한다. 지나가는 시선은 다름 아니라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찰나의 아름다움은 그의 시가 직관 혹은 암시의 시학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은 끝장난 얼룩처럼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끝장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 인식이지 비극주의나 패배주의는 아니다. 생의 궁극 혹은 생의 질량을 얼룩으로 인식하는 그는 그런 면에서 실존적이다.
그 끝은 무이기도 하고 감각의 세계이기도 하다. 시인은 끝에 이르는 모든 것의 몸이 “남색 끝동으로 거기에 있다”(<풍경인>)고 했다. 끝동의 선이 몸이라고 했다. 총체성으로서 몸과 선이 같다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몸 혹은 육체에 대한 인식을 시인은 무시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 관념 혹은 부채 의식을 갖고 있진 않지만 현존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시편 곳곳에 그런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김영태의 풍경’은 삶이 거세된 풍경이 아니다.
200자평
문학과 음악과 무용과 미술을 사랑했던 시인 김영태. 그에게 미의 완성은 소멸이고 무였다. 그가 평생 열망했던 흰 눈처럼 염결한 무화(無化)의 세계를 만나 보자.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던 과꽃도 지고 결국 남는 것은 “빈 하늘 한 장”일 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예술뿐이다.
지은이
김영태 시인은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작고했다. 경복고교,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59년 ≪사상계≫에 시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 둔다>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모두 18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1966년부터 자유극장 동인으로 활동했고 1969년부터 무용평을 기고했다. 1976년부터는 음악펜클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71년 이후 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현대문학상, 시인협회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 허행초상(무용평론상), 현대무용진흥회 댄스 하트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엮은이
권현형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김영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달콤한 인생> 등 5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등과 6인 동시집 ≪달에게 편지를 써 볼까≫를 출간했다. 번역서로 ≪성채≫ 등이 있다. 현재 계간 ≪시평≫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받았고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누군가 다녀갔듯이≫
누군가 다녀갔듯이
정적
虛行抄 시상식
얼룩
風景人
염화미소
불타는 마즈르카
정처
장구 소리
太平舞
진주 妖花舞
과꽃
≪남몰래 흐르는 눈물≫
남몰래 흐르는 눈물 24
남몰래 흐르는 눈물 3
진도 북춤
전람회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시만 쓰다가
눈송이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꽃·2
꽃·3
꽃·10
≪여울목 비오리≫
눈
별 하나 나 하나
水仙花 근처
달
空
등신같이
메뉴
≪北호텔≫
北호텔
雪景
寂寥
첼로
눈
모리스 라벨의 죽음
비
流配
無光澤 賞
詩·Ⅴ
詩·Ⅵ
종이꽃
草芥手帖
저녁 風景
金洙暎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
오리
새
나비
≪그늘 반 근≫
그늘
굳은살
너무 많이 울어 버린 여인
開花
비명
봄장마
길
임동창의 집
클림트의 鉛筆畵 1
그늘 반 근 2
사라지는 寺院 위에 달이 내리고
책 마흔여섯 권
금환빌딩 302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누군가 다녀갔듯이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자꾸 되돌아보시는가
●염화미소
꼿이요(꽃이요…)
이화중선이 말하기를
허리 가파롭다
장구채 든 허리가
솜눈 토해
멀리, 멀리 가지 말아요
끗이오(끝이오…)
진도산재비 팔십
무형문화재에게 타이르기를
허리 위아래 꼿이요
꺽지 마요 두고두고 봐요
눈 아프도록
멀리, 멀리는 가지 마요
●정처
무릎 꿇지 않겠다는 게
요즘 기류 같다
무릎 꿇지 않는 것은
소신이다 수세미는 되지 않겠다
호박이 되겠다 호박 넝쿨에
칼 대면 그만두겠다가
무릎의 이유였다
기침 소리에도 놀라는
좀생이들도 많다
살다 보면 외면해 버려야 하는 잡종들
인간 이하도 수두룩하다
정처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오지명 영화 제목이
‘까불지 마’라고?
삼류가 일류 되지 않듯(절대로!)
꽃 진 자리에 호박이
매달려 있듯 정처 옆에…
●비명
강화도 가는 갯벌에
제각기 성장한 의상을 입은
오리들이 평화롭다
사육장에 온 손님이
주인과 흥정을 하자
눈치챈 오리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필사의 疾走, 그것은
춤이었다
삼삼오오 흩어지다
서로의 날갯죽지 속에 긴 목을 묻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