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김형석의 수필은 수사적인 기교도 삶에 대한 포즈도 없다. 어떤 특별하거나 특이한 삶이 글쓰기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제목들이 글쓰기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그의 글쓰기의 대상이며, 가정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모색과 성찰이 주를 이룬다. 우리의 삶이 가정과 직장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대한 모색과 성찰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라는 관계 내에서 하는 경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관조와 통찰의 정도가 직접적이고 내밀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수필에서 글쓰기 대상이 가정이나 직장 내에서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경우가 많다. 특히 그의 경우처럼 인생에서의 행복에 대해 모색하고 성찰하는 것을 글쓰기의 모토로 내세운 이에게는 가정이나 직장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현실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인생 행복론을 펼치는 이에게 그것을 생활의 장에서 발견하고 모색하는 일은 자신의 글에 신뢰감을 주는 행위와 다름없다. 인생의 행복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세계가 바로 가정과 직장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행복이 관념이나 추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실질적인 영역에 있다는 것은 그의 수필의 성격을 규정짓는 바이기도 하다. 인생의 행복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숨 쉬고 잠자고 먹고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인식은 평범하고 소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과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인생의 불행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글 쓰는 자신이 인생 속에서 행복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여기에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해 내야 한다. 글쓰기 주체로서 그의 고민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그 자신의 어떤 통찰이나 발견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공감하거나 진정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형석의 수필은 공감할 수 있는 여지와 진정성의 깊이를 제공한다. 그가 즐겨 다루고 있는 글쓰기의 대상인 가정과 직장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소수의 혹은 선택받은 자의 특별함 같은 것이 없다. 그가 풀어 놓고 있는 이야기는 여느 가정이나 직장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평범한 사건들이다. 노모와 아내와 자식들로 구성된 가정과 대학 교수로서의 삶이 있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다. 이렇게 그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그가 살아 내고 있는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하나의 숙명처럼 놓여 있는 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을 행복하게 잘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바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누구의 길은 행복으로 가득한 반면 다른 누구의 길은 불행으로 넘쳐 날 수 있다. 이것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이 행복하냐 아니면 불행하냐 하는 문제는 그것을 살아 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고 또 그것이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인생론 혹은 행복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자평
인생이 행복하냐 아니면 불행하냐 하는 문제는 그것을 살아 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고 또 결정될 수 있다. 김형석의 수필은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인생을 통해 고독과 사랑, 행복을 이야기한다. 그의 인생론 혹은 행복론은 조용하고 간결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담긴 의미는 웅숭깊은 문제의식을 거느리고 있다. 사랑과 고독을 기반으로 한 글쓰기의 건조함과 딱딱함을 부드럽게 해 주는 유머 덕분이다. 웃음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통속적인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일정한 품격과 은근함을 통해 하나의 격식을 차린 형식으로 드러날 때 인생에 대한 관조와 통찰의 여유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은이
김형석은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교편을 잡으면서 하버드, 시카고 대학 연구 교환 교수로 활동했으며, 오스틴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철학 연구에 대한 깊은 열정으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으며, 끊임없는 학문 연구와 집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9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인생,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윤리학≫,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고독이라는 병≫, ≪백년을 살아 보니≫ 외 다수가 있다.
해설자
이재복(李在福)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2001)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 호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문화계간지 ≪쿨투라≫, 인문·사회 저널 ≪본질과 현상≫, 문학계간지 ≪시와 사상≫, ≪시로 여는 세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에 제9회 고석규 비평문학상과 제5회 젊은평론가상, 2009년에 애지문학상(비평), 2013년에 제23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몸과 그늘의 미학≫ 등이 있다.
차례
악이 주는 교훈
인촌(仁村)의 지혜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교우첩(交友帖)
수학이 모르는 지혜
자아 발견을 위하여
인간관계의 개선
자연의 상실
범인과 성인의 차이
너무 어려운 일을 택했다.
일하는 사람과 하게 하는 사람
말을 잘한다는 것
향수
약간 우울한 이야기
나그네의 고향
교수들의 비자금
넥타이 이야기
영화에서 보았던 이야기
조 박사의 흘러간 추억
사랑은 아름다운 것
여성, 아름다운 감정
커피 이야기
변 교수와 누드화
밧줄이 있는 바닷길
고독이라는 병
지금도 모르는 일
꼴찌에게도 상장을
사랑이 있는 산문
정 박사의 첫사랑
말[言語]이 고향이다
자유와 사랑의 변증법
양심보다 귀한 것
황혼의 우정
외상 선물
닭똥집과 가족 제도
까치집
집 이야기
막내의 마음
‘보미’ 이야기
아내의 질투
영화에서 눈물을
제자가 주는 용돈
첫사랑 이야기 둘
안병욱, 김태길 선생과 나
인생은 가고 별명은 남고
자유의 값을 깨닫는 사회
사랑이 있는 경쟁은 가능한가
춤 이야기
죽음에도 의미가 있는가
예수의 고향 이야기
교리적인 신앙보다 인간적인 진리를
해설
지은이에 대해
해설자에 대해
책속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고향은 사랑이 있는 곳이다. 사랑이 있다는 것은 아직 고향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을 남기고 떠나게 되면 그 떠나온 곳이 고향이 된다.
고향이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없는 사랑의 공간을 잊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고향에 가야 한다는 것은 사랑할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사랑은 큰일을 하지 못해도 된다. 관심을 끊을 수 없고 걱정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까닭이다. 병든 어머니는 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없다. 떠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머니는 필요한 의사가 떠나더라도 아들은 옆에 있기를 바란다. 의사보다는 더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살기 좋은 고장이 많아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직도 고향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더 빨리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심정은 사랑 속에 잠들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이 아니겠는가.
<나그네의 고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