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노생거 사원≫은 제인 오스틴의 완성된 소설 여섯 편 가운데 ‘별종’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작품이다.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아이러니와 풍자로 일관하면서 작품 전체가 하나의 패러디를 이루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은 감상소설(sentimental novel)과 고딕소설(gothic novel) 및 행위지침서(conduct book) 등 당대의 지배적인 문학 장르에 드러난 허위의식이나 과장된 감수성을 가차 없이 풍자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장르들의 패턴을 구성원리로 이끌어 가고 그 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노생거 사원≫에서 오스틴은 이러한 장르들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재창조한다. 우선 감상소설에서 설파하는 순수한 여주인공의 미덕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도했음에도 이 소설에서 캐서린과 헨리의 로맨스는 캐서린의 ‘고결한 마음’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십분 인정하면서 진정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감상소설의 패턴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위선이나 금전 지향적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캐서린의 순진무구함은 아이러닉하게도 헨리의 상식적이고 관습적 도덕에 한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이를 통해 중산층의 인습적 사고와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렇듯 ≪노생거 사원≫은 당대의 서사 양식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하면서 동시에 그 양식들의 정수를 포용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전도와 재창조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는 오스틴이 극히 첨예한 의식을 가지고 고도의 기법을 구사하며 소설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오스틴의 소설 가운데 유독 소설 기법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고 소설에 대한 옹호론을 펼치기도 하는 등 소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소설, 즉 메타픽션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 작품은 오스틴의 작가 의식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작가의 비판적, 유희적 정신과 예술적 기교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200자평
≪노생거 사원≫을 오스틴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평자들이 있는 것은 이 소설이 이룩한 높은 완성도를 입증한다. 이 소설은 당대의 서사 양식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하면서 동시에 그 양식들의 정수를 포용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전도와 재창조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오스틴의 신랄한 풍자와 위트, 독창적 기지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지은이
제인 오스틴(1775∼1817)은 1775년에 스티븐턴 교구 목사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시와 단편소설,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스무 살에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1795년부터 1799년 사이에 ≪오만과 편견≫, ≪분별력과 감수성≫, ≪노생거 사원≫을 완성했다. 1800년 부친의 은퇴와 더불어 바스로 이주하고, 1805년 부친의 사망 후 셋집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1809년에 오빠 에드워드의 집이었던 초턴의 코티지에 정착할 때까지는 작품 활동이 그리 왕성하지 못했다. 초턴에서 생애의 마지막 8년 동안,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 ≪에마≫, ≪설득≫을 완성할 수 있었고 1816년 마흔두 살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오스틴은 생전에 발표된 작품들이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사후에는 찰스 디킨스와 조지 엘리엇 등 빅토리아조의 소설가들에게 가려서 그리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조지 헨리 루이스와 헨리 제임스와 같은 평자들의 높은 평가에 힘입어 문학 정전의 반열에 들었으며 대중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스틴의 작품은 수백만의 열광적인 독자들을 확보했고 영화, 연극, 드라마 등에서 무수히 개작되면서 대중적인 문학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옮긴이
이미애는 현대 영국 소설 전공으로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지프 콘래드, 존 파울즈, 제인 오스틴, 카리브 지역의 영어권 작가들에 대한 논문을 썼고, 역서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J. R. R. 톨킨의 ≪호빗≫, ≪반지의 제왕≫(공역) 등이 있다.
차례
제1부
제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헨리가 지금은 진심으로 그녀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있고, 그녀의 선량한 성격을 알고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진정으로 즐거워하지만, 그의 애정은 다름 아닌 고마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었음을 나는 고백해야겠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자신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로맨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상황이고, 여주인공의 품위를 심각하게 떨어뜨린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것이라면, 상상력을 무모하게 발휘한 점은 적어도 순전히 나의 공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354쪽
이처럼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헨리와 캐서린이 느낄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최종적 결말에 대한 초조함은, 유감스럽게도 내 독자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이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이 달랑 한두 장 남은 책장을 보고 독자들은 우리 모두 완벽한 행복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들의 결혼이 어떻게 해서 신속히 성사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단 하나의 의문일 것이다. 장군 같은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은 과연 어떤 것일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바로 그의 딸이 부유한 명문가에 시집을 간 것이었다. 엘리너가 여름에 결혼하고 그럼으로써 명예를 얻게 되자 그는 변덕스럽게 기분이 좋아졌다. 일시적으로 희희낙락한 기분이 아직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 엘리너가 헨리에 대한 용서와 “원한다면 바보가 되라!”는 허락을 얻어 낸 것이다.
−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