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이 글귀는 다자이의 생애와 문학의 삶의 궤적을 대표하는 인용문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생을 고뇌의 기수로 살면서, 항상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과 삶의 혼돈된 궤적을 걸어온 ‘무뢰파(無頼派)’ 근대 작가다. 일생을 죄와 구원의 사이에서 방황한 작가이며, 이 고뇌하는 영혼의 기록이 다자이의 작품 세계다. 수차례의 약물 중독과 여성 동반 자살 시도를 거듭한 작가의 독특한 삶은 패전 후의 혼란과 허탈감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의 혼을 울린 일본 문단의 대변자로 영원히 남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 중기, 후기 3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대부분 초기와 후기의 것으로, 작가가 생의 불안과 고뇌에 빠져 지내던 시기다. 따라서 작품 역시 파멸과 반역을 표현한 것들이다.
다자이에게 반짝 찾아온 인생의 봄날, 창작 활동 중기의 기록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중기 작품들은 불안, 고뇌, 회한의 정서보다는 소박, 단순, 정직한 문학 세계를 표현한다.
소녀의 시점에서 변덕스럽고도 섬세한 사춘기 여학생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희망을 예리하게 묘사하는가 하면, 온 가족이 번갈아 창작한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화목한 가정과 행복을 그리기도 한다. ‘행복은 그것을 어렴풋이 기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인 것이지요’라는 문장은 이 시기 오자이의 ‘사랑’과 ‘행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성 독백체를 통해 섬세하고 감성적인 여성의 심리를 표현하기도 하고, 첫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회고를 통해 정직하고 인간의 순수하고 소박한 감정을 굴절 없이 묘사하기도 한다. 문득문득 인간에 대한 불신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와중에도 다자이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작품 소개
<여학생>은 다자이 중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여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아침 기상부터 잠들 때까지의 일상생활과 심리 변화를 ‘1인칭 여성 독백체’ 형식으로 쓴 글이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사춘기 여학생의 미묘한 심리와 섬세한 감각을 다룬 작품으로 다자이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독자적인 청순한 세계를 그렸다.
<사랑과 미에 대해>는 다섯 남매와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모두 로맨스를 좋아한다. 중기 다자이 문학의 사랑과 재생이 돋보이는 밝은 소설이다. 주인공 오 남매에는 다자이의 실제 형제들 모습이 일부 투영되고 있다. 이는 다자이 글쓰기 방법의 일례로 작품을 통해 새롭게 재탄생한다. 오 남매의 지극히 ‘다름’에서 ‘같음’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가족애가 느껴진다. 특히 다자이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개성 넘치는 남매는 다자이 자아의 분신으로 중기의 소망을 대변해 주고 있다.
<피부와 마음>은 여성의 심리를 1인칭 여성 독백체 형식으로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여성 문체로 여성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이자 다자이 오사무의 여성관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자이에게 ‘여성’은 특별한 존재다. 작가는 여성을 통해 자기 발견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한 섬세한 표현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여인 훈계>는 난해한 여성의 심리 묘사와 피부 감촉에 민감한 모습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현대의 독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다. 다자이 문학에 나타난 ‘인간 불신’의 희미한 그림자가 표현되고 있는 작품이다. 토끼 눈을 이식한 후 사냥꾼을 보고 공포심을 느끼게 되는 여성은 토끼 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토끼로의 변신을 자청한다. 다자이는 가면 쓴 여성을 통해 가식적인 인간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주인공 야스이 부인이 마흔한 살이 되어 가슴속에 간직한 추억을 꺼내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한 여성의 가슴 깊숙이 숨겨 둔 젊은 날의 추억을 고백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혼자만의 추억 여행은 지극히 아름다워 보인다. 작가는 사랑과 여성을 테마로 한 소설을 쓰면서 정직하고 소박한 감정을 순수하게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200자평
다자이 오사무 하면 누구나 “태어나서 미안합니다”라는 한마디를 떠올린다. 그의 작품은 ≪인간 실격≫을 비롯해 온통 퇴폐와 음울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수차례의 약물 중독과 자살 시도를 거듭하다가 39세의 나이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그에게도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의 창작활동 중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다자이의 중기는 작품의 양으로 본다면 전집 9권 중 5권 반을 차지할 정도로 창작 활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다자이 중기 작품이 제대로 출간되어 있지 않다. 작가는 이 시기에 소박, 단순, 정직한 문학 세계를 지향한다. 특히 ‘여성’, ‘사랑’, ‘미’를 표현한 작품이 유난히 돋보인다. 다자이 스스로 갱생을 열망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는 다자이 중기 작품의 특징인 사랑, 미, 여성의 소재가 돋보이는 다섯 편을 엄선해 실었다.
지은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는 일본 아오모리현(青森県) 가나기(金木) 태생으로, 신흥 대지주 쓰시마가(津島家)의 7남 4녀 중 열째로 태어나 유모의 손에 자랐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다. 어머니가 병약한 탓에 육친의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해, 일생을 불안과 고뇌 속에서 방황했다.
아오모리중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사키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이즈미 쿄카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에 심취하지만, 아쿠타가와의 자살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1930년 도쿄제국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하면서 좌익 운동에 가담한다. 이후 게이샤 출신 하쓰요와의 연애로 인해 가족과 불화를 겪고 학교에서도 제적당한다. 하쓰요와 결혼하고도 한동안 좌익 활동을 계속했으나 1932년 좌익 단체에서 탈퇴하면서부터 배반자라는 죄의식을 느끼며 문학에 매진한다.
다자이는 1936년 첫 번째 창작집 ≪만년≫으로 문단에 등장한다. 특히 자학적이고 파멸적인 분위기로 인간의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한다. 하쓰요와 결별하고 수차례 약물 중독과 자살 시도를 거듭하던 그는 1939년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하면서부터 비교적 안정되어 이 책에 실린 <여학생>을 비롯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간다.
1947년 대표작인 ≪사양≫을 발표하지만 1948년 6월 13일, 39세의 나이에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무사시노 다마가와 상수원(玉川上水)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 실격≫, 미완성작 ≪굿바이≫를 사후 출간한다.
다자이(太宰) 문학은 자의식 과잉과 굴절된 소외감을 참신하고 다채로운 수법으로 표현하는 한편, 익살과 불안으로 채색된 독자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만년(晩年)>(1936), <여학생(女生徒)>(1939),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1940), <쓰가루(津軽)>(1944), <사양(斜陽)>(1947), <인간 실격>(1948) 등 현대인의 영혼을 울리는 수작을 남겼다.
옮긴이
하정민(河廷旼)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을 전공했으며, <다자이 오사무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대학에서 일본어 문학 및 문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해외에서의 교육 및 활동은 2000년도부터는 일본 와세다대학교의 일본어 전수 과정 교육을 통해 선진 교육 및 학습 방법론을 습득해 발전시켰으며, 2007년도부터는 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 S. A) 영어 과정을 통해서도 선진 외국어 교육 방법론을 기반으로 TA 활동을 하면서 테슬(TESL)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미국 대통령(Barack Obama) 자원 봉사상을 2회 수상했고, 2018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좋은 수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가해 한국외대 영자 신문(The Argus)에 2019년 3월호의 인물(People)로 선정 게재되었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 문학 작품의 상징 연구에 관심이 많아 <다자이 오사무 문학과 <눈물>>(한국일어일문학회), <다자이 오사무 중기 작품에 나타난 복장 고찰>(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다자이 오사무 전기 문학(前期文学)과 ‘꽃’의 상징에 대한 연구>(대한일어일문학회)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주요 역서로는 ≪문학, 일본의 문학≫(제이앤씨, 2012), ≪일본 명단편선 1≫(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 공역), ≪일본 명단편선 4≫(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 공역)가 있다.
차례
여학생(女生徒)
사랑과 미에 대해(愛と美について)
피부와 마음(皮膚と心)
여인 훈계(女人訓戒)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내일도 다시, 똑같은 하루가 오겠지. 행복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온다. 내일 온다고 믿으며 자는 것이 좋겠지. (중략)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멍하니 그런 말을 떠올린다. 행복을 애타게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버렸는데, 그다음 날 멋진 행복한 소식이 버려진 집에 찾아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행복은….
<여학생>에서
여자란 이런 존재입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게 여자의 ‘천성’인걸요. 수렁 같은 난관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그날그날이 인생의 전부인걸요. 남자와는 다르지요. 그것만은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의 일도 생각지 못합니다. 사색도 없지요. 여자는 순간순간 아름다움의 완성만을 바랍니다. 생활을, 생활의 감촉을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여자가 밥공기나 아름다운 무늬의 기모노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만이 진정한 삶의 낙이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의 움직임. 그것이 그대로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피부와 마음>에서
어떤 기분이었던 걸까요?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 뒤를 따라가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겠다고 각오했습니다. 세리카와의 일 따윈 상관없어요. 오라버니와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요. 무슨 일이든 모조리 할 거예요. 오라버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아아, 이대로 저를 데리고 도망쳐 주세요. 부디 저를 망가뜨려 주세요. 혼자만의 일방적인 감정이 갑작스럽게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저는 어두운 골목길을 아무 말 없이 개처럼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가끔씩 비틀거리며 넘어지기도 했지만 이내 옷을 여미고 다시 묵묵히 달렸더니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진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