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891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일부 언론들은 “쓰이지 않는 게 나았을 책”, “부도덕하고 불결한 책”이라고 비난했다. 작가 오스카 와드는 예술과 도덕은 별개이므로 도덕적 시각에서 작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 문제로 인해 그의 부도덕한 삶이 여실히 반영된 것으로 간주되어, 스캔들과 치욕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되었다. 와일드는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나 사후 차차 그 작품성을 평가받으면서 1970년대 이후에는 진지하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와일드가 가볍고 대중적인 작품을 쓴 그저 그런 작가였는지, 지나치게 현대적인 사상을 개진했던 불우한 사상가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은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다. 작가를 대변하는 헨리 워턴 경은 새로운 쾌락주의를 주창하면서 영국 보수층의 종교적·윤리적 위선을 공격하고 풍자한다. 헨리 경은 예술의 이상 또는 화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도리언에게 인생에서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이며, 순간의 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에 열정을 갖고 모든 감각을 체험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이 도리언에게 끼치는 좋지 못한 영향은 작가가 작중 인물 헨리 경에게 보이는 공감과 비판의 양면적 태도를 잘 보여 준다.
헨리 경의 영향을 받아 삶을 예술로 간주하고 개인적 감각의 향유를 추구하던 도리언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초상화가 그를 대신해서 늙어 가게 한다. 바질 홀워드는 도리언에게 사랑을 느끼고 고뇌하며 그에게 영감을 얻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완성했지만, 도리언이 가까운 인물들을 타락의 길로 이끌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질책하며 그의 영혼을 구원하려 한다. 이에 도리언은 청교도적 사고를 지닌 바질에게 순간적으로 증오를 느끼고 그를 살해한다. 감각적이고 향락적인 삶을 추구하던 아름다운 도리언은 결국 살인자가 되고, 완전 범죄를 위해 사체를 유기한다. 그러나 범죄 행각이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과, 도리언에게 버림받아 자살한 옛 연인의 동생이 그에게 복수하겠다고 쫓아다니는 등 끔찍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는 공포를 잊기 위해 아편 중독자가 된다. 이러한 도리언의 파멸 과정을 통해 작가 와일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과 삶은 별개의 영역이며 예술에서 도덕을 따질 수 없다고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던 와일드가 결국은 그 공허함을 깨닫고 자신의 세기말적 심미주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기말의 상징적 작품으로서 당대 사회의 권태와 무기력, 나태와 절망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성애 코드를 암시하고 있다. 또한 와일드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이면을 들춰낸다. 상류사회의 경직된 사고와 위선을 비판하는 한편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함으로써 사회에 내재된 계급 간의 빈부 격차, 이민의 유입, 아편 중독, 타락한 군상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문명의 묘비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자평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세기말의 상징적 작품으로서 당대 사회의 권태와 무기력, 나태와 절망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성애 코드를 암시하고 있다.
지은이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 말 영국 유미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1854년 10월 16일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그는 왕실의 주치의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과, 혁명적 시를 통해 켈트 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엄청난 독서가이자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성장했다. 그는 1871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그리스와 르네상스 고전문학을 공부한 후 1874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데, 옥스퍼드에서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 같은 스승을 만나 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는다. 1878년 학위를 받은 후 런던으로 간 와일드는 위트가 넘치는 화술로 사교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미국에 유미주의를 알리기 위해 1년 간 순회강연을 다녔고 곧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와일드는 1883년 콘스턴스 로이드와 결혼해서 두 아들 시릴과 비비안을 두지만, 1891년 16세 연하의 옥스퍼드 대학생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잡지에 서평을 기고하고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와 같은 동화를 발표하며 여성잡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던 와일드는 1890년 ≪리핀콧≫이라는 잡지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와일드는 시·동화·소설·희곡·비평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글을 썼는데, 당시 영국 상류사회의 위선을 꼬집은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 <하찮은 여자(A Woman of No Importance)>, <이상적인 남편(An Ideal Husband)>, <성실함의 중요성(The Important of Being Earnest)> 같은 희곡 작품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으며 런던의 극장에서 계속 공연되었다. 그러나 앨프리드의 부친인 퀸즈베리 후작은 와일드와 아들의 비정상적 관계에 분노해 와일드를 남색가라고 비방하고 와일드는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발한다. 결국 그는 보수층에 의해 외설행위로 단죄되어 2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진다. 41세에 와일드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영혼의 자유와 아름다움이 철저히 배제된, 추하고 불결한 감옥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리며,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서서히 무너져 버리게 된다.
1897년에 출옥한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으며, 비인간적 형벌 체계에 대한 분노를 담은 <레딩 감옥의 노래(The Ballad of Reading Gaol)>를 발표했을 뿐 홀로 쓸쓸히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1900년 파리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다.
옮긴이
원유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모더니즘, 제국주의, 페미니즘, 디아스포라 등의 주제로 18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국 소설을 연구하였다. 저서 ≪영문학 속 여성 읽기≫를 비롯해 역서로 ≪오만과 편견≫, ≪타임머신≫, ≪당나귀와 떠난 여행≫ 등이 있으며, 그 외 논문 수십 편을 썼다. 현재 세명대학교 영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든 예술은 표층인 동시에 상징이다.
표층의 이면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다가 큰일 나는 수가 있다.
상징을 읽어 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다가 큰일 나는 수가 있다.
예술이 거울처럼 비춰 주는 것은 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바라보는 바로 그 구경꾼이다.
예술 작품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것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잡하고 활기가 넘치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비평가들의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예술가는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것을 숭배하지만 않으면 용서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무척 숭배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