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동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반영된 단편들이다. 작품을 발표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동양을 본 적 없었던 서양 작가가 무소유, 공(空), 인연, 윤회, 여백, 고행과 같은 동양적 정서를 정교하게 그리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첫 이야기인 <왕포는 어떻게 구원되었나>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화가 왕포와 제자 링의 이야기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노화가 왕포는 어느 날 황제가 사는 궁궐로 잡혀간다. 왕포의 그림들로 둘러싸인 방에서 10년을 세상과 격리되어 어린 시절을 보낸 황제는 그 방에서 나오면서 자기가 다스릴 한나라가 왕포의 그림에서처럼 아름답지 못함을 발견하고 노화가 왕포의 눈을 불로 지지고 두 손을 잘라 버리라고 명령한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왕포가 젊었을 때 그렸던 미완성 그림을 완성하라고 명령한다. 왕포는 그 그림에 푸른 바다와 작은 배 한 척을 그려 넣고 제자 링과 함께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의 보편적 주제 중 하나이지만, 젊은 유르스나르가 중국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다시 쓴 노화가 왕포의 이야기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동양적 여백의 미가 극대화되어 있다.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은 11세기 일본의 여성 소설가인 무라사키 시키부의 대하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겐지 왕자가 화려한 연애 시절을 보낸 후 세상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 유르스나르는 속세를 떠난 겐지 왕자의 마지막을 상상해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 프랑스식 다시 쓰기 버전에서 작가는 늙어서 눈이 멀게 된 겐지와 그의 옛 정부 하나치루사토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에 선정된 대작가 유르스나르가 30대에 가졌던 열정과 욕망, 삶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녹아들어 있어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200자평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초기 단편소설집이다. 그리스, 발칸반도, 일본, 인도, 중국 등에서 전해지는 전설들을 토대로 단편소설 열 편을 엮은 것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였던 유르스나르의 열정과 욕망, 삶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녹아들어 있다.
지은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는 1903년 프랑스인 아버지 미셸 드 크레양쿠르와 벨기에인 어머니 페르낭드 드 카르티에 사이에서 출생한다. 브뤼셀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산욕열로 열흘 후에 사망하자 본가가 있는 프랑스 북부 릴 근처의 몽누아르 성에서 성장한다. 프랑스 노르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였던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평생토록 반항, 모험, 여행, 사랑을 즐겼던 그 시대의 자유인이었다. 1980년 유르스나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상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된다. 1635년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가 프랑스어와 인문학을 진흥할 목적으로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40석의 종신회원으로 구성되는데, 345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성 회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르스나르의 아카데미 입회는 페미니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영광의 시기를 함께한 사람은 제리 윌슨(Jerry Wilson)이었다. 1979년에 사망한 그레이스 프릭의 빈자리를 대신해, 미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사진 작가 제리 윌슨은 전 세계를 함께 여행했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서 유르스나르의 마지막 삶의 증인이 된다. 이 시기 작가는 전 재산을 그에게 상속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지만, 1986년 에이즈로 그가 먼저 사망하자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해 전 재산을 환경보호 단체에 기부한다.
옮긴이
오정숙은 신촌골 연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에서 좌충우돌 꿈만 많던 청춘을 보내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운명의 작가 유르스나르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늘 예술에 취해 있는 파리에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아 삶 속에 녹아 있는 문화의 힘을 깨닫는다. 문학에서 문화로 관심 영역이 확장되면서, 문화 정책, 축제, 영화, 뮤지컬 등을 통해 한국과 프랑스, 퀘벡과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다채롭고 쌍방향적인 문화 소통을 꿈꾸며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 중이다. 경희대 프랑스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프랑스문화학회 부회장, 불어불문학회 재무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영원한 방랑자≫, ≪축제로 이어지는 한국과 유럽≫, ≪프랑스 작가, 그리고 그들의 편지≫, 번역서로 ≪유럽 문명의 아프리카 기원≫, ≪아프리카인이 들려주는 아프리카 이야기≫가 있으며, 그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왕포는 어떻게 구원되었나
마르코의 미소
죽음의 젖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
네레이데스를 사랑한 남자
제비들의 노트르담
과부 아프로디시아
목 잘린 칼리
마르코 크랄리에비치의 최후
코르넬리우스 베르그의 슬픔
1978년의 작가 후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작품 목록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슬픔에 취해, 겐지는 딱딱한 베개 위로 머리를 다시 떨어뜨렸다. 하나치루사토는 그 위로 몸을 굽히고 온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궁궐에 당신이 이름을 말하지 않은 다른 여인은 없었나요? 그 여자는 달콤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이름은 하나치루사토가 아니었나요? 아, 기억해 보세요.”
그러나 벌써 겐지 왕자의 얼굴에는 죽은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어떤 청정함이 어려 있었다. 모든 고통이 끝나자 그의 얼굴에서 포만감이나 쓰라림 같은 감정의 모든 흔적이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열여덟 살이라고 그 자신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치루사토는 모든 자제심을 잃고 울부짖으며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짭짤한 눈물은 폭풍우처럼 양 볼로 흘러넘쳤고, 뭉텅 쥐어뜯긴 머리카락은 비단 솜털처럼 날아다녔다. 겐지가 잊었던 유일한 이름, 그것은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78-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