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도 시대 말,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이 우라가(浦賀)항에 들어오며 기나긴 쇄국으로 동면에 빠져 있던 일본이 화들짝 잠에서 깬다. 이후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막부를 지키려는 사바쿠(佐幕)파의 극한 대립이 이어지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264년이나 지속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시작된 메이지 유신으로 마침내 왕정이 복고되며 근대의 문이 열린다. 도손의 역작 《동트기 전》은 이 시기, 1853년부터 1886년까지 34년간의 질풍노도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아오야마 한조(靑山半藏)라는 한 인간의 삶과 정교하게 직조된다. 도손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한조는 기소에서 대대로 전해진 가업인 역참과 숙박업을 이어 받은 인물이다. 기소가도 혹은 기소지는 일본의 독특한 역사·정치적 산물로서 에도(현 도쿄)에서 교토까지 약 507킬로미터의 북쪽 내륙 지방을 관통하는 길이다. 공식 명칭은 나카센도(中山道)로, 길 위에 69개소의 숙소가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이 기소가도로 이른바 ‘참근교대’의 행렬이 지나갔다. 막부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로,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는 의무적으로 에도의 쇼군 곁에서 1년을 머문 다음에야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겨우 1년을 지낼 수 있었다. 한조는 이렇게 기소가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보내는 일을 하며, 기소의 산간벽촌 멀리에서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지하며 이상향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자꾸만 한조의 바람과 역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본의 주요 비평가들은 이 소설을 국민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하며, 도손이 서구 문학에 대응하는 일본 고유의 문학을 창조하려 했다고 분석한다. 일본의 국문학자 미요시 유키오(三好行雄, 1926~1990)는 “역사를 좇는 거시적인 안목과 한조의 삶 주변의 미시적인 안목의 왕래가 매우 선명하다”며 “마지막 장에 감도는 애절함은 근대의 황급한 급류에 삼켜진 일본인의 진혼곡”과도 같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시노다 잇시(篠田一士, 1928~1987)는 자신의 저서 《20세기의 10대 소설(二十世紀の十大小説)》에서 이 소설을 일본 문학 작품 중 유일하게 선정하며, “공전절후의 걸작”이라고 세 차례나 표현했다. ‘희대의 독서가’로 불리는 유명 편집자이자 평론가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 1944~2024)는 대표 저서《천일천책(千日千冊)》에서 이 소설을 “근대 일본의 기억을 문학적으로 응축한 걸작”이자 “역사의 본질에 도전한 문학”으로 칭하며, 드물게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였다고 강조했다.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亀井勝一郎, 1907~1966)는 “아버지의 인생 비극과 근대 일본의 비극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작가 자신의 비극을 투영한 역사소설”이라고 평했다.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200자평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34년간의 일본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일본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자연주의 소설가인 시마자키 도손이 준비에 9년, 집필에 7년, 도합 16년의 세월을 바친 역작이다. 한조 아오야마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개인과 국가, 전통과 근대화의 갈등을 치밀하게 그려 냄으로써 일본 근대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지은이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시, 소설, 수필, 동화 등 문학의 전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해 일본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작가다. 1872년에 나가노현(長野縣) 니시지쿠마군(西筑摩郡) 미사카(神坂)에서 아버지 마사키(正樹)와 어머니 누이(縫)의 막내로 태어났다. 도손의 가문은 1513년에 선조가 기소(木曾)로 이주해 와서 대대로 촌장과 역참과 숙박업을 가업으로 이어 왔는데 바로 아버지 마사키가 본 소설 주인공 한조의 모델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권학편》 등을 배웠고 열 살 때 도쿄로 유학을 가서 매형 집에서 기숙하며 다이메이(泰明)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 후 여러 곳으로 전전하며 15세 되던 해에 시바(芝)에 있는 영어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정신적 스승인 기무라 구마지(木村熊二)에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해 11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메이지(明治) 학원 본과에 입학한다.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18세 되던 해에 동경대 교양학부의 전신인 제1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실패를 계기로 문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21세인 1892년부터 잡지 《여학(女學)》에 습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22세에는 《문학계(文學界)》 창간 동인으로 참가하고 거기에 작품을 발표하며 필명인 도손(藤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26세 되던 해에 발표한 《새싹집(若菜集)》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일약 무명에서 스타덤에 오른다. 특히 그 안에 수록된 〈첫사랑(初戀)〉이라는 7·5조의 정형시가 독자들을 단숨에 매료한다.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국민적 시인이라는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다. 그는 연이어 네 번째 시집 《낙매집(落梅集)》까지 간행하지만 시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산문으로의 전향을 염두에 두고 습작 삼아 수필 《지쿠마가와강 스케치(千曲川のスケッチ)》를 발표한다. 이 작품도 명작으로 명성을 얻는다. 31세에는 〈옛 주인(舊主人)〉이라는 첫 단편소설을 발표하는데 풍기 문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발매를 금지당하고 만다. 33세에는 결연한 각오로 자비 출판을 계획하고 장인에게 자금 원조를 부탁하는데 이 작품이 1906년 35세에 출간되는 《파계(破戒)》다. 천민 계급의 차별 문제를 픽션으로 다룬 것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출세작이며 일본 자연주의 작품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1908년, 과거 22세 때 제자를 사랑한 나머지 학교를 사직하고 여행을 떠났던 자신의 사건을 소설로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고 간행한 것이 바로 《봄(春)》(1908)이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이른바 사소설 글쓰기가 유행하며 이 흐름이 일본 자연주의의 주류가 되었다. 39세에는 《집(家)》(1910)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하는데 출가한 누이의 가문과 친정의 두 가문의 가부장제하의 퇴폐와 붕괴의 과정을 그린 누이의 생애를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47세에는 상처하고 혼자 지내던 중 집안일을 돌보러 온 조카를 임신시킨 사실을 소설로 써서 발표하게 된다. 《신생(新生)》(1918)은 작가 자신의 치부 고백의 완결편이지만 “노회한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라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혹평을 듣기도 한다.
58세부터는 본 작품인 《동트기 전》 집필을 시작한다. 그동안 축적해 온 작가적 역량을 총동원한 비장한 글쓰기였는데 이 작품은 그가 평생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자아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아버지를 추적한 것이며 그 아버지라는 메타포에 자신의 내적인 성찰과 고뇌도 함께 상감해 넣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 도피 도중 우연히 목격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전쟁 참화와 그에 따른 국가의 존재를 절감하면서 정치 시스템까지 아우르는 역사 소설을 써야겠다는 문학적인 사명감을 이 소설을 통해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4세에 이 작품을 완결한다. 그리고 72세에 소설 《동방의 문》을 집필하던 중 사망한다.
옮긴이
김용안
198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LG상사에 근무하다가 한국외대 석사과정을 거쳐 2004년에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전공해 〈시마자키 도손 연구−자아 찾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한양여자대학교 일어통역과에 부임하여 2020년 정년퇴임, 명예교수가 될 때까지 주로 일본의 문화와 문학을 연구했다. 그사이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일본 쇼와여자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했으며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 일본 근대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일본소설 행간으로 읽다》,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공저), 《일본문학 속의 여성》(공저), 《동화, 시대를 읽다》(공저), 《게다도 짝이 있다》(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흙의 슬픔(土の悲しみ)》, 《일본 명단편선 2》(공역), 《일본 명단편선 4》(공역), 《일본 명단편선 8》(공역)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하루키와 바나나 소설 소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관목 숲속(藪の中)》 연구〉,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人間失格)》 연구〉,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손(手)》 연구〉,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슌킨쇼(春琴抄)》 연구〉,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金閣寺)》 삽화 연구〉등이 있다.
차례
서장
제1부
제1장∼제12장
개정판 제1부에 부치는 글
제2부
제1장∼제14장
종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도카이도의 우라가 쪽에 흑선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기치자에몬이나 긴베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에도에서는 큰일이 났다고 할지라도 그런 소동은 곧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에도에서 332킬로미터나 떨어진 기소 산속에 살면서 쇄국 이후에 기나긴 겨울잠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미국이라는 이국적인 존재조차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 가도를 타고 전해지는 소문의 대부분은 속담과도 비슷해서 구를 때마다 크나큰 덩어리가 되는 눈사람과도 닮았다. 6월 10일 밤에 히코네의 파발마가 남기고 간 소문도 그런 것으로 14일에는 흑선이 86척이나 된다는 믿기 어려운 부풀려진 이야기가 되어 전해져 왔다.
-《동트기 전 1》 중에서
2.
15대 쇼군의 대정봉환의 소문이 민간에 알려짐과 동시에 각종 유언비어가 연이어 전해져 올 무렵이었다. 그 가운데 이상한 오후다(お札)가 각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일어났다. 동시에 어디부터 일어났다고도 할 수 없는 “좋지 않은가”라는 구절에 각종 노래 문구나 우스꽝스러운 말이 끼워져서 박자를 맞추는 일이 유행했다.
좋지 않은가? 좋지 않은가?
오늘 밤 빻는 절구는 뭐 뻔한 것.
할머니여, 야식 냄비를 걸어라.
좋지 않은가? 좋지 않은가?
모두 이 노래 박자에 깔깔거리고 기뻐하며 맞이했다. 그 가락은 비천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했지만 밝고 재치 넘치는 점에 친숙함을 느끼게 했다. 뭔가 예절 바른 것을 때려 부수는 야만스러움에 울려 퍼지는 힘이 있었다.
-《동트기 전 2》 중에서
3.
이국은 아직 많은 나라에게 미지수였다. 기나긴 쇄국의 결과, 세계는커녕 동양의 최근 사정에서조차 소외되었던 이 나라 사람들이 최초의 영국 영사로부터 각종 고정관념이 될 만한 일을 배웠다. 해리스는 무엇이 50년 이전부터 서양을 변화시켰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증기선이나 전화기 등의 교통 기관의 출현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교역에 의한 세계의 하나 됨”의 의지가 생긴 것도 증기선의 발명 이후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및 중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처럼 교류를 개방하지 않기에 역시 외톨이의 형국이며 중국은 18년 전에 영국과 전쟁을 일으켰지만 에이전트가 수도에 주재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전쟁으로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중국 정부의 태도를 언급하면서, 광둥 담당관을 통해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 처음부터 오산이었다고 밝히며 정부가 다루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파국에 이르렀고 광둥 담당관이 완벽하게 그럴싸하게 꾸민 다음 적당히 정부에게 진언한 데다 담당관이 영국에 대해 거만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동트기 전 3》 중에서
4.
그때가 되어도 아직 한조는 오른쪽이어야 할까, 왼쪽이어야 할까의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한 줄기의 새로운 진로가 열리려는 지금 신의 주거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찾아가면 된다, 이런 때를 맞아 자신은 뭘 망설이는가? 하며 그는 자문했다. 그것에 대답하는 일은 쉬운 듯하면서도 쉽지 않았다. 그가 본진, 역참장, 촌장을 겸하던 시절에는 어쨌든 교토와 에도 사이를 연결하는 기소가도 중앙에 살며 첩첩산중이지만 동서 교통의 요충지에 서 있었다. 이 세상의 움직임은 좋든 싫든 마고메 역장인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오히려 신구의 격한 대립이 각양각색의 형태를 띠며 넘쳐 나는 작금의 시기에 그런 것은 일체 상관없이 그저 신을 지키러 가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닌 데다 일단 히다의 산 같은 오지에 틀어박혀 버리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처지라고도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트기 전 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