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보그다노비치의 운문 소설 ≪두셴카(Душенька)≫는 푸시킨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두셴카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장편 서사시는 1778년에 첫 번째 부분만 출판되었고, 5년 후인 1783년에 비로소 전체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작품은 간단하게 ≪두셴카≫라고 불렸고, ‘고대 설화에 대한 자유 형식의 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두셴카≫는 신화를 기초로 만들어진 유사 서사시(Mock Epic)라 할 수 있다. 에로스 신의 사랑에 대한 옛 신화를 익살스럽게 희화화한 작품이다. 러시아 18세기에 쓰인 소위 “유머” 시들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라퐁텐(La Fontaine)이 쓰고 드미트리예프 마모노프가 1769년에 러시아어 번역판을 출판한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의 주인공 프시케(Psyche)로부터 따온 것이다.
보그다노비치의 ≪두셴카≫는 창작품이 아니라 아풀레이우스 원작의 ≪황금 당나귀≫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개작한 라퐁텐의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1669)을 다시 그 나름대로 번안한 것이다. 라퐁텐은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에 함축된 고대 그리스 신화의 철학적 기반을 배제하고 에로스적인 파불라만을 남긴 채 서사의 흐름을 살롱의 소희극 형식으로 재창조했다. 보그다노비치는 라퐁텐의 기법을 배워 본인 서사시의 특징적인 자질로 삼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상하고 영웅적인 것’을 지양하고, 러시아 민속시의 익살스러우면서 아이러니한 모티프를 폭넓게 차용했다. 구어체에 가까운 단순하고 경쾌한 문체 또한 작품의 익살스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보그다노비치의 서사시는 장기간 돌풍과도 같은 성공을 누렸다.
≪두셴카≫에는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작품의 형식이다. 의사 서사시를 쓰는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전통적인 서사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알렉산더격이라고도 불리는 약강 6보격을 지키지 않는 17세기 러시아 시인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보그다노비치는 참신하게도 이 약강 6보격을 따르기를 완전히 거부하고, 알렉산드르 수마로코프가 확립한 전통과 수마로코프 이후의 픽션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약강격을 적용한 시구의 길이와 리듬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원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작품에서 짙게 드러나는 러시아색이다. 보그다노비치는 대중에게 친숙한 운문 구조를 택하고 러시아의 구비 설화로부터 모티프와 인물을 따왔다. 예를 들어 러시아 동화에 나오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뱀인 고리니치, 불로불사의 마법사인 코셰이, 아프로디테가 두셴카를 보내 뱀을 찾아오라고 시키는 것, 그 물로 몸을 씻으면 몸이 낫는 마법의 샘물과 시체를 씻으면 살아나는 마법의 샘물 등이 있다. 게다가 두셴카는 러시아 동화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농민들이 입는 의복인 사라판을 걸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러시아의 당대 현실을 상세히 묘사한 부분이 많다.
200자평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이 18세기 러시아 시인 이폴리트 보그다노비치의 감성으로 펼쳐진다. 고상하고 비극적인 영웅은 사라지고 러시아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경쾌함이 드러난다. 운문 소설의 형식은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지은이
시인 이폴리트 표도로비치 보그다노비치(Ипполит Фёдорович Богданович)는 1744년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이후 최고 재판소의 부속 수학 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시, 음악, 그리고 연극에 관심을 보였던 보그다노비치는 미하일 헤라스코프(М. М. Херасков)와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의 승인을 받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다.
1760∼1762년 보그다노비치는 헤라스코프가 발간하던 문예지 ≪유익한 유흥≫에 동참했고, 여기에 여러 편의 자작시를 문예지에 실었다. 이 시기 그는 파닌, 다슈코바 등의 인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특히 다슈코바의 후원을 받아 ≪보잘것없는 습작≫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문예지는 약 6개월 정도 발행되었다가 이내 폐간되었다.
1766년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가 외무성에서 통역관으로 일했고,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약 3년 동안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 후 러시아로 돌아와 외무성에서 계속 근무했다. ≪저녁≫, ≪러시아 문학 애호가들의 지침서≫, ≪월간 신작들≫ 등의 문예지에 공동 편집진으로 참여했고, 서정시, 송시, 시편이나 목가시를 번역해 기고했다.
보그다노비치는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이내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저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가 편집한 문예지인 ≪보잘것없는 습작≫은 볼테르나 엘베시우스의 저술들을 매번 번역해 지면에 실었다. 이 문예지 1호에 그는 <신분 평등에 대한 연설>이라는 시와 볼테르의 <리스본 지진에 대한 시>를 실었다. 이들의 작품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표방하면서 관념론적 낙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765년 그는 교훈적 서사시의 전통을 이어 가며 세 편의 단시로 이루어진 서사시 ≪더없이 큰 행복≫을 출판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며 가장 기본적인 보편적 행복은 물질적 평등과 사유 재산의 부재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보그다노비치는 1773년에 ≪리라≫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국민의 행복이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프랑스 작가 마르몽텔 작품들의 번역본과 보그다노비치 본인의 자작시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꿀벌과 호박벌(Пчёлы и шмель)>이라는 우화에서 일을 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는 귀족들을 수벌(게으름뱅이)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그러나 푸가초프의 난 이후로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 개혁적 모티프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견지하던 자유사상에서 한발 물러서며, 궁중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1780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서국에서 근무한다. 1775∼1782년에는 정부 기관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를 발행했다. 1785년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칙령에 따라 ≪러시아 격언들≫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작품집에서 러시아 민속 문학은 정부 차원에서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민중의 신앙심과 정중함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사용될 뿐이었다. 보그다노비치는 격언의 슈제트를 바탕으로 희곡과 서정적인 희극인 <두셴카의 기쁨>을 썼지만, 독자층으로부터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질 못했다. 1786년에는 투만스키와 공동으로 문예지 ≪세계의 거울≫을 편찬한다. 1788년에는 문서국장의 자리를 맡는다. 1796년에 퇴임한 후 쿠르스크로 이전한다. 그곳에서 그는 1803년 1월 6일(18일) 쿠르스크에서 생을 마감한다.
옮긴이
조주관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OSU) 대학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시간 철학(Time Philosophy in Derzhavin’s Poetics)>이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학술 위원을 지내고, 2000년 2월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바로크적 세계관과 토포이 문제>(교과부장관상 수상)가 있고, 저서로 ≪러시아 시 강의≫, ≪러시아 문학의 하이퍼텍스트≫, ≪고대 러시아 문학의 시학≫(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음식과 성≫, ≪호피를 두른 용사≫, ≪러시아 현대비평이론≫, ≪음식과 성≫, ≪시의 이해와 분석≫, ≪주인공 없는 서사시≫, ≪말로 표현한 사상은 거짓말이다≫, ≪자살하고픈 슬픔≫, ≪오늘은 불쾌한 날이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검찰관≫, ≪타라스 불바≫, ≪보리스 고두노프/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아흐마둘리나 시선≫, ≪보즈네센스키 시선≫, ≪오쿠자바의 노래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중세 러시아 문학(11∼15세기)≫, ≪16세기 러시아 문학≫, ≪17세기 러시아 문학≫, ≪17세기 러시아 풍자문학≫, ≪참칭자 드미트리≫, ≪노브고로드의 바딤/마차 때문에 일어난 불행≫, ≪만물상≫ 등이 있다.
차례
서문
클로에의 미덕에 대한 노래
제1권
제2권
제3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두셴카의 남편은 운명에 의해
괴물로 정해졌다.
그 괴물은 모든 사람에게
화살을 쏘는 자요
전 지역의 고요함을 흐트러뜨리고
세상을 파괴하는 자다.
그 괴물은 때때로 심장을 갈기갈기 찢으며
눈물로 양식을 삼고
끔찍한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등에 찼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그는 원하기만 하면
화살을 쏘고,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불태우고,
구속한다. 심지어 스틱스 강조차
그의 길을 막지 못한다.
그토록 결정적인 운명의 세 여신과
모든 신들조차, 계시를 내릴 때
그를 청하는 계시를 내리지.
30리 떨어진 여태까지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이름 없는 산의 바로 정상까지
공주를 데려가라. 그리고 거기서
그녀를 운명에 맡겨 두어라.
그녀가 행복해지든 불행해지든
살든지 죽든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