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드래곤〉은 러시아에서 가장 활발히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다. 아서 왕 전설 속 기사 랑셀로가 드래곤을 무찌르고 마을 사람들과 사랑하는 여인을 구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친숙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바르츠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에 1930년대 독재자의 전횡으로 고통받는 소련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담아냈다. 〈드래곤〉은 무시무시한 드래곤으로 기형화된 전제 권력을 비판하는, 랑셀로 전설의 20세기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예브게니 시바르츠는 고전 동화를 차용하거나 동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작품들에서 알레고리적 상징, 모호한 선악 개념, 허를 찌르는 반전을 통해 당대 사회와 정치적 현실, 인간의 본질과 품성을 꼬집고 폭로했다. 〈벌거벗은 임금님〉(1934), 〈그림자〉(1940)에 이어 전제 폭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드래곤〉(1944)은 시리즈를 마감하는 희곡답게 대담하고 용감무쌍하다. 삼부작은 권력의 본질과 대중의 속성, 통치의 기술, 정치의 타락과 왜곡 등을 예리한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희곡들이다. 삼부작이 집필된 시기는 유럽에서 정치권력의 기형화와 대중 우민화가 극심해지던 때였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고 제국주의 침탈과 폭압이 세계적 규모에서 자행되던 절망의 시대였고, 2차 세계대전은 그 모든 폐단과 모순을 유혈낭자한 살생의 지옥도로 도상화한 사태였다.
소련 또한 유럽의 파시즘 못지않게 독재자의 전횡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폭압과 학정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연히 시바르츠의 전제 폭군 삼부작은 검열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림자〉도 상연 직후 레퍼토리에서 내려와야 했으며 〈드래곤〉 또한 비슷한 처지였다. 〈드래곤〉의 위험성을 간파한 권력 당국은 레닌그라드코미디극장에서만 상연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허락했지만 단 1회 만에 바로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62년 같은 극장에서 재공연되었을 때도 몇 회 공연하지 못하고 금지 명령이 날아들었다. 노골적인 정치 풍자 드라마도 이렇게 혹독한 탄압을 당한 사례가 없었다. 용이 나오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등장하는 동화 같은 작품에 이토록 예민하게 대응한 것은 그만큼 〈드래곤〉의 메시지가 권력과 통치의 본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뜻 보기엔 유치하고 단순하지만, 언중유골 정신과 골계미를 장착한 동화는 그만큼 위험하다.
200자평
예브게니 시바르츠는 동화적인 모티프에 현실 사회 문제를 긴밀히 연결지어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전한다. 대표작 〈그림자〉와 〈드래곤〉은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특히 〈드래곤〉에서 시바르츠는 특유의 우화적 극작술을 통해 스탈린 독재 권력이 대중을 어떻게 길들이는지 보여 주고 대중의 각성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한다. 현재까지도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연되는 작품이다.
지은이
예브게니 리보비치 시바르츠(Евгений Львович Шварц, 1896∼1958)
예브게니 시바르츠는 생전에 희곡을 20편 이상 집필했으며, 영화 시나리오 11편을 완성한 러시아 극작가다.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17년 혁명이 발생하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훌륭한 발성법과 유연한 연기술로 평단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배우로서 보장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0년대 초에 당시 최고의 동화 작가였던 코르네이 추콥스키의 비서로 들어갔다. 그 뒤 1923∼1924년 사이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 데트 사라이란 필명으로 시적인 칼럼을 썼다. 1924년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시바르츠는 국립 출판사의 아동 도서 분과에 들어갔다. 시바르츠가 맡은 일은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작가들의 구상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확장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희곡과 시나리오는 영화,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로 제작되었고, 여전히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연출가 아키모프는 1956년 작가의 회갑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바르츠의 동화가 성공한 비결은 이겁니다. 그는 마법사와 공주, 말하는 고양이, 곰으로 변한 청년 등을 통해 정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해 주고 있고, 행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선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겁니다.”
옮긴이
백승무
러시아 전문가이자 연극 평론가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학술원 산하 러시아문학연구소에서 〈불가코프의 극작술 연구〉로 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2008년부터 서울대, 성균관대, 한예종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공연과 이론》, 《한국희곡》, 《TTIS》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불가코프의 메타드라마 연구〉, 〈스타니슬랍스키의 모순에 대한 소고〉, 〈메이예르홀트 공연의 음악성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는 《20세기를 빛낸 극작가 20인》(살림출판사), 《한국연극, 깊이》(우물있는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부활》(문학동네), 《메이예르홀트의 연출 세계》(한국문화사)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랑셀로 : 드래곤이 당신들 등골을 빼먹는군요.
샤를레망 :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린 불만 없습니다.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그가 여기 있으니까 다른 드래곤이 감히 우릴 건드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랑셀로 : 제 생각에 다른 드래곤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걸요!
샤를레망 : 그러다 갑자기 나타나면요? 드래곤들 등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드래곤을 한 마리 갖는 거밖에 없어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우리한테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시는 게 어떻소?
16-17쪽
드래곤 : 자네가 그들 영혼을 본다면 끔찍할 거야.
랑셀로 : 아니오.
드래곤 : 당장 도망쳤을걸. 저런 인간들 때문에 죽을 순 없을 테니까. 이봐, 내가 저들을 기형적으로 만들었어. 필요해서 그렇게 만들었지.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이 강해. 사람 몸을 반으로 자르면 곧 죽어 버리고 말지. 하지만 영혼을 반으로 자르면 더 충성스러워지거든. 아니야, 아니야, 이곳 사람들 같은 영혼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이 도시에만 있다니까. 손 없는 영혼, 발 없는 영혼, 귀가 먹은 영혼, 쇠사슬에 묶인 영혼, 밀고자 영혼, 저주받은 영혼. 자네는 왜 시장이 미친 척하는지 알고 있나? 자신에게 영혼이 없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야. 너덜너덜해진 영혼, 뇌물을 좋아하는 영혼, 재만 남은 영혼, 죽은 영혼. 아니야, 아니야. 저 영혼들이 자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참 유감스럽군.
67-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