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제4권에 나오는 ‘여왕의 열정’ 에피소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말로는 베르길리우스의 소재와 언어를 일정 정도 사용하지만, 궁극적으로 베르길리우스와는 다른 장르, 인물, 장면, 플롯, 세계상을 창조해 낸다. 베르길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제국을 찬양하기 위한 로마 제국의 대서사시로 ≪아이네이스≫를 구상했음은 잘 알려진 바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썼던 기원전 1세기 후반의 로마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공화정이 무너지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로 황제에 등극하여 제정으로 넘어가는 정치적 과도기였다. 베르길리우스는 제정 로마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트로이와 그 문명을 로마 제국의 선조로 내세움으로써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기억을 대신하려 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왕조들도 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러한 제국 양위의 기획을 도입했던바, 엘리자베스조도 예외는 아니어서 트로이의 혈통 브루투스가 영국의 시조이고 런던이 신 트로이라는 제국 신화가 중세 몬머스의 제프리와 웨이스의 저작들을 통해 당시 영국인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통치하의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하며 제국주의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이 책이 보여주는 이른바 반베르길리우스주의, 반제국주의적 사고는 파격적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소재를 이용하고는 있지만, 말로의 희곡은 그 반어적 톤에서 오비디우스에 더 가깝다. 그만큼 신과 영웅은 희화화되고, 제국주의적 기획은 의문시되는 것이다.
200자평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크리스토퍼 말로가 쓴 첫 극작품이다. 하지만 불분명한 원작자, 창작 시기 등의 이유로 말로의 정전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학창 시절의 습작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작품이 말로 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이 책이 말로의 작품 세계와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뿐더러 인종, 젠더, 제국주의 등 다양한 현대적 관심사를 논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말로 초기의 전복성과 진보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지은이
크리스토퍼 말로의 일생은 그의 작품들만큼이나 극적이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로 요절한 말로는 여덟 편의 희곡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가 영문학사에 미친 영향은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지대하다. 말로는 1564년 2월 26일 캔터베리에서 제화공 존 말로와 캐서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64년 4월에 태어난 셰익스피어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셈이다. 말로는 캔터베리의 왕립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케임브리지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장학생으로 수학했다. 성직자의 미래가 예정된 행보였으나, 말로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다. 재학 중 이미 말로는 첫 희곡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를 썼으며, 오비디우스와 루카누스를 번역하는 등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1587년 말로의 석사학위 수여가 보류되는데, 그가 1585∼1856년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가톨릭 신학교가 있는 랭스에 다녀왔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부재 기간 여왕에게 ‘유용한 봉사’를 했다는 추밀원의 개입으로 말로는 일단 혐의를 벗는다. 당시 ‘유용한 봉사’란 밀정 활동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말로는 석사학위를 받지만, 성직 대신 극작을 택하여 런던으로 향한다. 말로가 1587년에서 158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탬벌레인 대왕≫ 1부와 2부는 런던 로즈 극장에서 애드미럴 경 극단에 의해 공연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는 ≪파우스트 박사≫, ≪몰타의 유대인≫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말로의 런던 시절에 대해서는 이 네 편의 희곡들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토머스 키드, 로버트 그린, 가브리엘 하비 등 동시대 문인들이 기억하는 말로는 이단적 사고와 무신론에 빠져 있는 위험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말로는 필경 월터 롤리 경의 무신론 학파에 속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밀정 팀, 즉 프랜시스 월싱엄 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593년 말로는 의문의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5월 30일 뎁퍼드에 있는 선술집에서 일어난 칼싸움에서 눈을 찔려 숨을 거둔 돌연사였다. 이는 토머스 키드의 증언에 따라 이단 혐의로 추밀원이 말로의 체포 영장을 발부한 후의 일이었다. 그는 진정 사소한 술값 다툼으로 인한 칼부림의 희생자였을까. 아니면, 말로의 이단적 사상이 첩보라는 그의 ‘유용한 봉사’를 덮어버릴 만큼 현 정부와 질서를 위협하여 제거된 것일까. 말로의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점은 하나도 없다. 말로는 불과 10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영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다. 파우스트, 바라바스, 탬벌레인 대왕, 디도와 같은 거인적 영웅을 만들어낸 것은 한계와 통념을 뛰어넘고자 하는 전복과 위반의 정신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말로가 살았던 르네상스라는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로의 작품들에는 중세 기독교적 우주의 거대한 질서와 틀에서 벗어나 자아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투쟁, 도전, 좌절, 회의, 두려움,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말로는 약강 5보격의 무운시 양식을 희곡 양식에 부활시켜 벤 존슨의 찬사처럼 ‘막강한 시행’을 통해 실제보다 거대한 인물상을 빚어낸다. 이들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 자아를 찾아 비상하고 추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의 영웅들에게서 최초의 근대적 인간상을 발견하는 것이며, 말로를 영국 근대극의 시초로 평가하는 것이다.
옮긴이
임이연은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셰익스피어와 무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영국 무대사, 문화사와 현대 문화 상호주의 극을 다루는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르네상스 영문학과 현대극에 대해서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대산문화재단 지원으로 벤 존슨의 희곡 <볼포네>와 <연금술사>를 번역하여 200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죽음은 없으니,
그의 모습에서 영원함을 보기 때문이라.
그의 입맞춤 한 번으로 나는 불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