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 서정시의 부활
17세기의 고전주의와 18세기의 계몽주의에 밀려 프랑스 서정시는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 문을 다시 연 것이 바로 라마르틴이 29세 때인 1820년 익명으로 발간한 ≪명상시집≫이다. 라마르틴의 데뷔작이자 첫 대표작인 이 시집은 문장의 울림과 운율의 힘,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섬세하고 유연하며 우울한 시구에 내재한 다감하면서도 고상한 영혼의 끊임없는 떨림과 빛깔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소멸의 시’, ‘부활의 시’
라마르틴은 어렴풋하고 불명확한 묘사를 통해 영혼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그의 시에서는 감각 세계의 모든 대상들이 죽음이라는 도착지만을 갖기 때문에, 마치 그 모든 게 이승에서 은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마르틴은 자신에 대한 ‘포기’를 헛되이 이상화하면서도 자신이 견디고 있는 ‘상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회한’이라는 공간 속에서 대상이 소멸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 대상은 ‘추억’이라는 공간 속에서 결핍에 대한 괴로운 의식을 동반한 채 재창조되어 죽은 것은 다시 살아나고, 잊힌 것은 다시 기억된다. 그러므로 라마르틴의 시는 ‘소멸의 시’인 동시에 ‘부활의 시’라 할 수 있다.
‘시 그 자체’였던 시인
1839년에 ≪시적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판한 뒤 10년 동안 그는 정의와 민중의 복지를 위해 정치가로 정열적인 활동을 하면서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 그가 정치에 나서면서 단호한 어조의 웅변으로, 또는 담화문으로 위대한 민주주의 사상, 박애 정신, 인도주의 등을 찬양했던 것처럼, 라마르틴은 입신출세에 눈이 먼 비열한 자들을 멸시하면서 정도(正道)만을 고집한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고결한 영혼은 오롯이 자연과 인류를 비추는 아름다움과 착함을 위해 바쳐졌다. 그리하여 훗날 파르나스 시인들의 스승이 된 테오필 고티에의 말처럼, 라마르틴은 정말 시 그 자체였던 것이다.
200자평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 라마르틴의 시 52수를 엮었다. 라마르틴은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프랑스 서정시를 되살렸고, 인류의 운명에 관한 상징적인 서사시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자연과 인류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시로 노래할 뿐 아니라, 정의와 박애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테오필 고티에의 말처럼 ‘시 그 자체였던’ 라마르틴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지은이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1869)의 완전한 이름은 알퐁스 마리 루이 드 프라 드 라마르틴(Alphonse Marie Louis de Prat de Lamartine)이다. 그는 1790년 10월 21일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마콩(Mâcon)에서 가톨릭 귀족이자 기병대 대위인 아버지 피에르 드 라마르틴(Pierre de Lamartine)과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귀족 출신의 어머니 알릭스 데 루아(Alix des Roys)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콩 근처의 시골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그는 리옹의 기숙 학교를 거쳐 벨레 중학교에서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프랑스 작가 샤토브리앙 등을 탐독하면서 문학적인 소양을 키워 나갔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어머니의 사촌 집이 있는 나폴리에 머물면서 젊은 여공 안토니엘라(Antoniella)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이후 그는 그녀를 모델로 삼아 소설 ≪그라치엘라(Graziella)≫(1852)를 발표했다. 1816년 요양차 방문한 온천지 엑스레뱅(Aix-les-Bains)에서 만난 여섯 살 연상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쥘리 샤를(Julie Charles) 부인은 곧 폐결핵으로 사망했지만 라마르틴의 뮤즈가 되어 그의 시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1820년은 첫 시집인 ≪명상시집≫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데다, 나폴리 주재 대사관 보좌관으로 임명되는 등, 라마르틴이 문학적·사회적 입지를 다진 한 해였다. 그의 외교관 경력은 1830년에 사직하기까지 피렌체 대사관 대리 공사, 토스카나 상업 교류 담당관 등으로 이어졌는데, 그 시기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병행해 라마르틴은 저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829년 샤토브리앙, 빅토르 위고, 생트뵈브 등의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우했고, 같은 해 샤토브리앙의 추천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당선했다.
1830년의 ‘7월 혁명’ 이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입장을 밝힌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라마르틴은 정치에 집중하기 위해 문학 활동을 중단했다. 1848년 입헌 군주인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를 폐위시킨 ‘2월 혁명’에 뒤이어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 라마르틴은 외무부 장관에 선출되면서 사실상 내각의 수반으로 부상했으며 그해 4월에는 노동 계급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0개 지역에서 입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그는 참패를 당했고, 실의에 빠진 라마르틴은 그 길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1850년에 파산한 그는 그로부터 죽기 직전까지 20년 동안 잇따라 시, 역사, 비평, 개인적인 술회 등에 걸쳐 저술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살기 위한, 그리고 빚을 갚기 위한 문학적 중노동”이었다.
1869년 2월 28일, 라마르틴은 파리의 자택에서 그의 질녀와 양녀만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1869년 3월 4일 그의 시신은 기차로 파리에서 고향 마콩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들과 파리의 작가들을 포함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을 치른 뒤, 마콩 가까이 라마르틴 가문 소유의 성이 있던 생푸앵(Saint-Point)의 작은 예배당 묘소의 가족들 곁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비 머리에는 유언에 따라 ‘내 영혼은 소망했노라’를 뜻하는 라틴어 문구(Speravit anima mea)가 새겨졌다.
옮긴이
윤세홍은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수학했다. 파리 7대학에서 불어학 학사, 그리고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파리 4대학 대학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빅토르 위고의 시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1998년부터 창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 불시 강의≫, ≪프랑스 문화 산책≫이 있으며, 역서로는 ≪프랑스 설화 여우 이야기≫, ≪위고 시선≫, ≪베를렌 시선≫, ≪뮈세 시선≫, 주요 논문으로는 <빅토르 위고의 ‘새로운 시구(詩句)’의 이론과 실제>, <빅토르 위고의 ‘혁명적 각운’의 실제>, <빅토르 위고의 ‘새로운 성서’>, <베를렌 시의 회화성>, <베를렌의 음악적 시>, <베를렌 시의 현대성> 등이 있다.
차례
고독
엘비르에게
저녁
계곡
절망
추억
은퇴
호수
태양에 바치는 찬가
고별
가을
별들
나비
과거
슬픔
아몬드나무 가지
EL***에게
비가(悲歌)
위로
환영(幻影)
사랑의 노래
시여, 안녕히
귀환
잠에서 깰 때 아이가 부르는 찬가
서쪽
욕망
불멸의 자연, 덧없는 인간
여인의 우정
앨범에 꽃아 둔 말린 꽃
양귀비
바닷가의 조가비
페리윙클
아버지 집의 창문
그라치엘라여, 안녕히
꿈 얘기를 들려준 어느 소녀에게
꽃의 정령들
여인의 기도
눈 속에 피어난 장미꽃
몽블랑
날개 달린 벌레
열다섯 살 된 약혼녀에게
거울 테
한 송이 꽃
사계(四季)
귀뚜라미
찬송가를 연주하는 하프
어떤 이름
제비
B*** 양에게
포도밭과 집
범선(帆船)들
내 생각을 해 주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영원, 무(無), 과거, 어두운 심연이여,
너희는 세월을 삼켜 무슨 일을 벌이느냐?
말하라! 너희가 우리에게서 강탈해 가는
그 숭고한 황홀을 돌려주려느냐?
오, 호수여, 말없는 바위여, 동굴이여, 울창한 숲이여!
시간에서 벗어나 있거나, 시간이 더 젊어지게 할 수 있는
너희들이여! 아름다운 자연이여,
적어도 오늘 밤의 추억을 간직해 다오!
아름다운 호수여, 너의 휴식 중에, 너의 폭풍우 속에,
너의 아름다운 비탈의 풍광 속에,
저 검은 전나무 숲속에, 네 물에 드리운
저 거친 바위 속에 추억이 머물러 있기를!
흔들리며 지나가는 미풍 속에,
물가에서 물가로 전해지는 소리 속에,
부드러운 빛으로 네 표면을 하얗게 만드는
은빛 이마를 지닌 별 속에 추억이 머물러 있기를!
신음하는 바람, 한숨짓는 갈대,
네 향기롭고 가벼운 내음,
들리고, 보이고,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렇게 말하도록 하라. “그들은 서로 사랑했노라!”
<호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