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로스메르는 얼마 전 아내 베아테를 잃었다. 평소 우울증을 앓던 베아테는 집 앞 물레방아 폭포에서 뛰어내렸고, 이후로 로스메르는 물레방아 폭포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레베카는 그런 로스메르를 안타까워하며 로스메르 곁을 지킨다. 베아테가 살아 있을 때 그녀를 돌보며 로스메르 집안 살림을 봐주던 보모 레베카는 베아테가 떠난 저택에서 로스메르 부인으로서 베아테의 역할을 완벽히 대신한다. 그러나 베아테의 부재 속에 싹튼 로스메르와 레베카의 플라토닉 러브는 뜻하지 않은 공격과 비난으로 위기를 맞는다. 무엇보다 베아테에 대한 죄책감이 둘 사이에 무겁게 가로놓여 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로스메르와 그에게 연민을 가진 레베카의 순수한 사랑과 그 좌절을 그린 듯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입센은 전작 <유령>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심리와 영혼을 깊숙이 파고들어 삶을 지배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이는 인물의 내면을 파헤쳐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인물의 선택, 가치관, 습관, 언어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처럼 입센의 관심은 후기로 갈수록 정치 사회적 이슈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으로 향한다. 그 과도기에 있는 작품이 바로 <로스메르스홀름>이다. 인간 내면에 대한 입센의 탐구와 통찰은 프로이트에게 영감을 제공했고 이는 뒤에 정신분석학의 토대가 된다.
<로스메르스홀름>는 첫 발표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뤼녜 포의 공연으로 온 유럽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열풍은 뉴욕과 영국의 무대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최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로스메르스홀름>에 대한 다양한 현대적 재조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출판은 물론 공연조차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정확하면서도 무대화에 적합한 번역과 전문적인 해설로 처음 <로스메르스홀름>을 온전히 소개한다.
200자평
로스메르 집안에는 유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백마가 떠다닌다. 로스메르 집안사람들은 이 백마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데려간다고 믿는다. <유령>과 짝을 이루는 이 작품은 입센의 관심사가 정치 사회적 이슈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1894년 이후 온 유럽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뉴욕을 거쳐 영국에서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현대적 재조명이 시도되고 있지만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은 물론 제대로 공연조차 된 적 없는 작품이다. 초역으로 소개한다.
지은이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은 1828년 3월 20일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서 남서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작은 항구도시 시엔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집이 파산해 열다섯 살까지 약방에서 도제로 일했다. 독학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 준비를 하는 한편, 신문에 만화와 시를 기고했다. 희곡 <카틸리나>(1848)를 출판했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그 후 <전사의 무덤>(1850) 상연을 계기로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1851년 국민극장 상임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초청되었는데, 이때 무대 기교를 연구한 것이 훗날 극작가로 대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57년에 노르웨이 극장으로 적을 옮긴 뒤 최초의 현대극 <사랑의 희극>(1866)과 <왕위를 노리는 자>를 발표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목사 브란을 주인공으로 한 대작 <브랑>(1866)을 발표하여 명성을 쌓았다. 이후 <페르 귄트>(1867), <황제와 갈릴리 사람>(1873) 등에서 사상적 입장을 확고하게 굳혔다. 이어 사회극 <사회의 기둥>(1877), <인형의 집>(1879) 등을 발표했다. 특히 <인형의 집>은 여주인공 노라가 남성에 종속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하려는 과정을 묘사해 여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0년 뇌출혈로 첫 발작을 일으킨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06년 78세로 사망했다.
옮긴이
조태준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앙토냉 아르토의 연극이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객원교수를 거쳐 배재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학교(ULL)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연극 이론 및 극작술, 공연 미학에 대한 논문과 칼럼을 여러 편 썼으며,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연극≫(천재교과서, 2018)을 공동 집필했고, ≪골고다의 딸들≫(한웅출판, 1992), ≪바람의 전쟁≫(열린세상, 1996) 등의 번역 소설과 번역 희곡 ≪유령소나타≫(지만지, 2014), ≪바다에서 온 여인≫(지만지, 2015), ≪로칸디에라≫(지만지, 201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지만지, 2018), ≪헤다 가블레르≫(지만지, 2018), ≪건축가 솔네스≫(지만지, 2019), ≪루나사에서 춤을≫(2020, 지만지)>을 펴냈다. 또한 연극 현장에서 극작가 및 연출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고 현재 극단 인공낙원 대표, 극단 하땅세 상임 연출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창밖의 앵두꽃은 몇 번이나 피었는고>, <3cm>, <푸른 개미가 꿈꾸는 곳> 등이 있으며, 연극 <유령소나타>, <루나사에서 춤을>, <목소리>,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애랑연가>, <규방난장>, 오페라 <류퉁의 꿈> 등을 연출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레베카: (뜨개질감을 모으면서) 여기 로스메르스홀름에선 유독 죽음에 집착들을 하잖아요.
헬세트 부인: 제 생각에는요, 아가씨, 죽은 자들이 로스메르스홀름에 집착하는 거예요.
레베카: (그녀를 쳐다보며) 죽은 자들이요?
헬세트 부인: 네, 그게 말하자면, 생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질 못한다고나 할까요.
레베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죠?
헬세트 부인: 글쎄요, 그게 아니고서야, 백마가 여기 나타날 리 없죠, 제가 아는 바로는.
레베카: 그 백마 얘긴 뭐죠, 헬세트 부인?
헬세트 부인: 오, 말해 봤자 뭐 하겠어요. 그런 얘긴 믿지도 않으시면서.
-7쪽
로스메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신 모르지? 날 괴롭히는 이 모든 기억들로부터… 이 침울한 과거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어떤 건지 모르지?
레베카: 어떻게요?
로스메르: 새롭고, 생생한 현실로 맞서는 거지.
레베카: (의자 등받이 쪽을 더듬으며) 생생한…? 그게… 뭐죠?
로스메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레베카, 이제 당신에게 물어봐도 될까… 내 두 번째 아내가 되어 주겠소?
레베카: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기뻐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의 아내! 당신의…! 제가요!
로스메르: 그래요, 해 봅시다. 우리 두 사람은 하나가 되는 거야. 여기엔 더 이상 죽은 자를 위한 빈자리가 있어선 안 돼.
레베카: 제가… 베아테 자리에…!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