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뒤샹의 변기는 대체 무얼 말하려는 걸까?
현대미술의 본질을 파헤치는 ‘철학적 미술 비평가’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원칙·관습에 대한 무분별한 거부와 정치적 구호의 남발 속에서 예술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갈수록 관객과 동떨어졌다. ‘철학적 미술 비평가’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상황에 “성전”을 선포하고 예술의 활로를 모색한다. 조각부터 디지털 미디어 아트에 이르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예술의 의도와 욕망 그리고 내적 본질을 묻는 크라우스의 탐색은 관객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며 현대미술을 전례 없이 흥미로운 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어 간다.
크라우스의 비평은 당대의 새로운 담론들 안에서 스스로를 쉼 없이 쇄신해 왔다. 초반에는 매체의 물질성에 편중했던 모던 미술 비평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 미술의 분열적 작업들을 다양하고 충만한 해석으로 재평가했다.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새로운 실천의 구조적 질서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지우고 ‘모든 것은 예술이다’라는 공허한 구호에 빠지자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 그 속에 억압된 욕망과 모순을 불러낸다. 이렇듯 크라우스는 예술의 본질을 매체에 누적된 역사와 규칙에서 찾으며 예술이 제공하는 전율과 즐거움을 되찾으려 한다.
이 책은 구조주의와 현상학, 정신분석학을 넘나드는 크라우스의 복합적인 사유를 열 가지 키워드로 알기 쉽게 정리한다. 크라우스가 구조주의의 ‘기호사각형’이나 자크 라캉의 ‘L 도식’, 조르주 바타유의 ‘분변학’ 등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활용했는지 상세히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오귀스트 로댕, 잭슨 폴록, 마르셀 뒤샹, 피트 몬드리안 등 이름은 친숙하지만 작품은 난해한 작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만날 수 있게 한다.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 )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미술사학과의 교수이자 미술비평가다. 1976년 저명한 비평지 ≪옥토버(October)≫를 공동 창간했으며 수십 년간 현대미술 담론을 주도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현대 조각의 흐름(Passages in Modern Sculpture)≫(1977), ≪아방가르드의 독창성 그리고 다른 모더니즘의 신화들(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 Modernist Myths)≫(1985), ≪시각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1994), ≪비정형(Formless)≫(1997), ≪북해에서의 항해(A Voyage on the North Sea)≫(1999), ≪영구적 재고 목록(Perpetual Inventory)≫(2010), ≪언더 블루 컵(Under Blue Cup)≫(2011) 등이 있다. 각 저술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미술의 변화와 발전을 해설하는 가장 정교한 이론적 공헌으로 평가된다.
200자평
미술비평가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예술의 의도와 욕망 그리고 내적 본질을 묻는다. 구조주의와 현상학, 정신분석학 이론들을 넘나들며 포스트모던 미술 연구의 전범을 마련했다. 그러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신화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망각하자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욕망과 모순을 재발굴하며 매체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다. 이 책은 새로운 담론들 안에서 스스로를 쉼 없이 쇄신한 크라우스의 사유를 열 가지 키워드로 살핀다.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현대미술을 이해할 실마리가 여기 있다.
지은이
최종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현대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매체 미술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절린드 크라우스의 ≪언더 블루 컵≫(2023)을 번역했으며, 포스트미디엄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다.
차례
로절린드 크라우스의 삶과 학문
01 현대 조각의 흐름
02 독창성과 반복
03 기호사각형
04 지표와 나르시시즘
05 시각적 무의식
06 비정형
07 포스트미디엄 상황
08 기술적 토대
09 매체의 재창안
10 크라우스의 유산
책속으로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이 의거하는 해석적 전통에 따르면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Plastic art)은 시간의 유동적 흐름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형식인 문학과 달리 단지 정지된 한순간만을 표상하며, 그 표상을 물리적 매체와 3차원 공간에 새기는 ‘공간적 예술’이다. 그런데 크라우스는 오히려 현대 조각이 시간성에 깊이 결부되어 있음에 주목하고, 관객의 경험과 감상의 시간 속에 지속되는 조각의 흐름을 새로운 “현대적 감수성”으로 선포한다. 크라우스의 조각론은 회화를 우위에 두고 다다(dada)와 미래주의 그리고 구축주의의 조각적 성취에 무관심했던 그린버그와 대척을 이루며, 회화를 능가하는 조각의 새로운 흐름을 읽어 내고 미니멀리즘과 같은 모더니즘 말기 예술의 전환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설득력 있는 모델을 제공한다.
_“01 현대 조각의 흐름” 중에서
크라우스는 이 자기 반복의 구조가 미술사에서 잘 포착되지 않았던 오랜 관습이라 주장한다. 가령 우리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즉 어떤 참조나 범례도 없이, 자연으로부터 그대로 그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풍경화는 (대가들의 걸작에 대한 오랜 감상 경험에 의해) 먼저 작가 내면에 그릴 만한 것으로 착상된 “그림 같은(picturesque) 풍경”의 현실화이며, 따라서 “풍경은 그에 앞선 (내면적) 그림의 복제가 된다”. 이처럼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은폐되어 왔던 이유는 미술사가 “원작(originals)의 문화에 기초한 양식의 미적 권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_“02 독창성과 반복” 중에서
크라우스는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만 레이, 마르셀 뒤샹, 파블로 피카소, 잭슨 폴록과 같은 모더니즘의 대가들을 다시 소환하고 그들의 작품 속에서 “주류 모더니즘의 시각적 논리를 거부하는” 시각적 무의식의 흔적들을 상세히 살핀다. 대개 이 흔적들은 환원적 논리에 의해 정제된 형식적 순수함, 아방가르드의 번득이는 의식적 독창성과는 거리가 멀다. 시각적 무의식의 표현들은 비정형적이고 암시적이며 퇴행적이다. 이 무의식적 표현 속에서 작품들은 ‘음부가 성기를 움켜쥐듯 사물을 표현한다’던 뒤샹의 외설적 발언처럼 억압되었던 성적 충동과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억압을 조명함으로써 그린버그가 주조한 모더니즘의 순수시각성 이면에 존재하는 모더니즘의 억압된 욕망과 무시된 세부 그리고 중단된 모순들을 다시 불러내며, 그렇게 현대미술을 전례 없이 흥미로운 비평의 대상으로 만든다.
_“05 시각적 무의식” 중에서
오토마티즘이란 매체가 (그 매체의 기술적 요소에 통달하고 자기 예술의 관습에 정통한) 예술가들에게 자연스럽게 허락하는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창작 원리로서 재즈 연주자가 자기 악기의 기술과 연주 관습에 따라 음악을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시인이 운율이나 각운과 같은 시의 특정한 기술적 관습에 따라 시를 지으며, 무용가가 왈츠나 탱고와 같은 특정 무용 기술의 관습에 따라 자동적으로 안무를 구현해 내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오토마티즘은 이렇게 선택된 매체의 기술적 특성과 그 매체가 발현되는 예술의 관습이 유기적이고 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숙련된 예술가로 하여금 예술을 특정한 양태로 완성케 하는 창작의 메커니즘이다.
_“08 기술적 토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