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 1920∼2009)를 향한 수식어는 많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사랑과 망명의 시인”이다. 베네데티에게 시작(時作)의 목표는 언제나 “민중,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망명과 향수, 기억, 죽음, 저항, 분노, 연대 등 다양하게 변주되는 가운데에도 예외 없이 모두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에게 사랑이란 “삶의 가장 상징적인 요소의 하나”이자 “인간관계의 절정”이며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고 “죽음에 맞설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요소”였다.
그의 사랑 개념은 시를 쓰고 투쟁해야 하는 이유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개인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조국과 민중, 더 나아가 인류 보편에 대한 광대한 전망으로 확장된다. 이 책에 실린 <그대를 사랑해>에서 보이듯이 ‘나’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손이 / 정의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고, “그대의 눈빛이 / 미래를 응시하고 미래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며, “그대의 입이 / 저항을 외칠 줄 알기 때문”이고 “그대가 곧 민중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작가에게 펜은 불의에 맞서는 총과 다를 수 없었다. 1973년 베네데티의 조국 우루과이에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뚜렷한 현실 참여 행보를 보이던 베네데티에게 혹독한 정치적 탄압이 이어졌다. 이에 베네데티는 우루과이 국립대학의 학과장직을 사퇴하고 12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이 기간 베네데티는 화인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긴 망명의 경험을 더 넓고 더 깊은 보편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외침만으로는 부족하고 / 눈물이나 분노로도 충분치 않기 때문 /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사람을 믿기 때문 / 패배를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밭고랑 위에 비 내리고 / 우리는 삶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중심인 조국이 있었기에 그의 망명은 결코 도피나 방황이 아닌 성숙을 동반한 진정한 여행이었다.
베네데티의 시는 언제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시어는 단순하면서도 투명하다. 그의 시가 그려 내는 이미지는 누구나 실생활에서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시는 기발한 비유를 동원하거나 호들갑스럽게 감정을 표출하는 허영을 드러내지 않으며, 난해하거나 실험적이지도, 특별한 지적 도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읽고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하고 명료한 베네데티의 시어는 그러므로, 이름 없는 민중들의 언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베네데티는 평범한 독자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고 가슴으로 다가간 진정한 민중 시인이었다.
파블로 네루다, 로베르토 볼라뇨, 세사르 바예호 등의 시를 비롯해 남미 문학을 꾸준히 국내에 소개해 온 김현균 역자가 그의 대표 시 95편을 선정해 번역했다. 특히 이번 책에는 역자에게 마리오 베네데티를 처음 알게 해 준 고 이성형 교수(1959∼2012)의 에세이 <노래로 살아 있는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2009)의 전문을 부록으로 실어 감동을 더했다. 역자에게 베네데티의 시를 처음 알려 준 이성형 교수에게 그의 시를 꼭 번역하겠노라 약속한 바를 이 책으로 뒤늦게나마 지켰다는 역자 후기는 베네데티의 시와 더불어 독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 줄 것이다.
200자평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지식인 마리오 베네데티의 시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베네데티는 무엇보다 “민중,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언제나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풍겨 난다. 정치적 신념에 엄격하고 투철한 혁명적 지식인이면서도 관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베네데티의 시는 언제나 부드러움과 단호함이 공명하는 아름다운 이중주를 빚어낸다. 스페인어권 40명이 넘는 가수가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를 정도로 전무후무한 대중적 사랑을 받았으며 2009년 사망 당시 우루과이 정부가 국장으로 예우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비롯해 남미 문학을 꾸준히 국내에 소개해 온 김현균 역자가 베네데티의 대표적인 작품 95편을 엄선해 번역했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김현균 역자에게 베네데티를 처음 알게 해 준 고 이성형 교수(1959∼2012)의 에세이 <노래로 살아 있는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를 부록으로 실어 감동을 더했다. 이성형 교수에게 베네데티의 시를 꼭 번역하겠노라 약속한 바를 이 책으로 뒤늦게나마 지켰다는 역자 후기는 베네데티의 시와 더불어 독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 줄 것이다.
지은이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 1920∼2009)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시와 소설, 단편, 에세이, 희곡, 비평 등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넘나들며 일평생 80여 권의 책을 출간한 다작 작가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 “단편과 소설을 쓴 적 있는 시인”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수십 년 동안 문학 및 정치 잡지의 편집자로 일했고, 우루과이를 비롯한 스페인어권 여러 신문에서 문학, 영화 및 연극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베네데티는 1920년 9월 14일 우루과이 북부의 소도시 파소 데 로스 토로스에서 이탈리아인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약사이자 와인 양조 연구가였던 아버지가 사업에서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열넷의 어린 나이에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외판원, 출납원, 속기사, 공무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 나가야 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 학업을 포기하고 독학의 길을 걷다 20대 중반에 시와 단편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이후 그는 ‘비판적 세대’라고도 불리는 ‘45년 세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우루과이 사회의 축소판을 그려 낸 시집《사무실의 시(Poemas de la oficina)》(1956)는 보름 만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이 책을 필두로 《오늘의 시(Poemas del hoyporhoy)》(1961), 《조국의 개념(Noción de patria)》(1964), 《꿈결(A las de sueño)》(1967), 《타인들의 시(Poemas de otros)》(1974), 《일상(Cotidianas)》(1974), 《집과 벽돌(La casa y el ladrillo)》(1974), 《망명의 바람(Viento del exilio)》(1982), 《바벨의 고독(Las soledades de Babel)》(1991)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우루과이 시를 공허한 서정성으로부터 건져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베네데티는 소설과 단편에서도 뚜렷한 자기 스타일을 구축했다. 몬테비데오 중산층의 삶을 담은 단편집 《몬테비데오 사람들(Montevideanos)》(1959)과 《사무실의 시》를 소설화한 《휴전(La tregua)》(1960)은 고독과 소외, 사랑과 욕망, 행복, 죽음의 문제와 함께 정치·사회 문제에 민감한 작가의 날카로운 현실 분석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 밖에 운문 소설《후안 앙헬의 생일(El cumpleaños de Juan Ángel)》(1971), 사회 비판 소설 《불에 감사해(Gracias por el fuego)》(1965), 단편집 《죽음과 다른 뜻밖의 사건들(La muerte y otras sorpresas)》(1968)과 《향수에 잠겨 향수 없이(Con y sin nostalgia)》(1977), 고발극 《페드로와 대장(Pedro y el capitán)》(1979), 정치적 성격의 에세이집 《자책하는 나라(El país de la cola de paja)》(1960)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현실 참여 행보를 지속적으로 실행했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그가 집행부로 소속되어 있던 정치 조직인 확대전선이 불법화되고 편집자로 있던 잡지 《마르차(Marcha)》가 폐간되었으며 그의 작품 역시 금서로 지정되는 등 정치적 박해가 이어졌다. 이에 1971년부터 맡아 오던 라 레푸블리카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리마, 아바나, 팔마 데 마요르카,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12년의 기나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우루과이 독재 정권과의 투쟁, 활발한 창작 및 저널리즘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85년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간 정부가 들어서자 오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스페인을 오가며 스스로 탈망명(desexilio)이라 이름 붙인 생의 말년을 보낸다. 1987년에는 군사 독재기에 자행된 범죄 관련 재판을 저지하기 위해 공포된 ‘국가의 처벌 요구 소멸 법안’을 무효화하기 위해 구성된 ‘국민 투표 지지를 위한 국민위원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베네데티는 말년에 국내외적으로 폭넓은 인정을 받아 국제 앰네스티 황금 불꽃 상(1987),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메달(1996), 레온 펠리페 상(1997), 이베로아메리카 레이나 소피아 시상(1999), 이베로아메리카 호세 마르티 상(2001), 메넨데스 펠라요 국제상(2005), 파블로 네루다 메달(2005), 모로솔리 금상(2006)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또한 바야돌리드 대학, 알리칸테 대학, 아바나 대학, 코르도바 대학, 라 레푸블리카 대학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2년 몬테비데오의 저명 시민으로 추대되었다. 2004년 알레산드라 모스카(Alessandra Mosca) 감독의 〈마리오 베네데티와 다른 뜻밖의 사건들(Mario Benedetti y otras sorpresas)〉, 리카르도 카사스(Ricardo Casas) 감독의 〈진정한 말(Palabras verdaderas)〉 등 시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두 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 스페인어권 40여 명의 가수가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이 시인으로서 그에게 가장 큰 영예가 되었다.
베네데티는 2009년 5월 17일 88세를 일기로 몬테비데오 자택에서 호흡기 및 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문학과 인권을 증진하고, 특히 실종 수감자들의 행방을 찾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옮긴이
김현균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에서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국내에 알리고 스페인어권에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 루벤 다리오 시선 《봄에 부르는 가을 노래》, 파블로 네루다 평전 《파블로 네루다》(공역), 파블로 네루다 시집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네루다 시선》, 세사르 바예호 시집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 로베르토 볼라뇨 시집 《낭만적인 개들》, 로베르토 볼라뇨 소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부적》, 《안트베르펜》, 이베로아메리카 동시선 《작은 성냥갑》, 마리오 베네데티 소설 《휴전》,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 소설 《아디오스》,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레타마르 에세이 《칼리반−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 읽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에세이 《시간의 목소리》, 스페인어권 단편선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김수영 시선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Arranca esa foto y úsala para limpiarte el culo)》,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Tengo derecho a destruirme)》, 한국 현대문학선 《끝이 시작되었다(Por fin ha comenzado el fin)》(공역)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각각 멕시코, 스페인, 콜롬비아에서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는 《낮은 인문학》, 《차이를 넘어 공존으로》, 《라티노/라티나 : 혼성 문화의 빛과 그림자》, 《스페인어권 명작의 이해》, 《세계를 바꾼 현대 작가들》(이상 공저),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등이 있다.
차례
카탈로그(Inventario) 1950∼1985
조국은 인류다 Patria es humanidad
기분 좋은 어둠 La buena tiniebla
망명의 바람 Viento del exilio
집합론 Teoría de conjuntos
기분 Talantes
활용 Conjugaciones
세월의 흐름 Pasatiempo
더디 온다 Tardía
카세트로 듣는 마드리갈 Madrigal en cassette
열한 번째 계명 Once
아옌데 Allende
창을 때리는 돌멩이 Piedritas en la ventana
삶이라는 전투 Esa batalla
나무로부터 나무에게로 De árbol a árbol
바다에 던진 병 Botella al mar
시간 없는 시간 Tiempo sin tiempo
기쁨을 수호하라 Defensa de la alegría
새로운 대양 간 운하 Nuevo canal interoceánico
징후 Síndrome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 Por qué cantamos
먼발치를 바라보는 남자 Hombre que mira más allá de sus narices
아들을 바라보는 죄수 Hombre preso que mira a su hijo
전술과 전략 Táctica y estrategia
쉼표 Pausa
내 탓입니다 La culpa es de uno
연인들은 집으로 돌아가네 Lovers go home
고독 Soledades
마음 상태 Estados de ánimo
숫자 3이여 안녕 Chau número tres
우리 계약을 맺자 Hagamos un trato
친밀함 Intimidad
물러서지 마 No te salves
그대를 사랑해 Te quiero
아직 Todavía
당신들과 우리들 Ustedes y nosotros
궁금하다 Seré curioso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Me sirve y no me sirve
균열 Grietas
비탄과 분노 Consternados, rabiosos
시작법 Arte poética
얼어붙은 달 Luna congelada
아니라고 말하라 Decir que no
이력 Currículum
무지개 Arco iris
내일 보자 Hasta mañana
깜박임 Parpadeo
조국의 개념 Noción de patria
쓰지 못한 시 Poema frustrado
천하태평 Calma chicha
매 순간 Todo el instante
흉갑을 두른 심장 Corazón coraza
떡갈나무 왼편 A la izquierda del roble
그녀가 지나간다 Ella que pasa
너무 적다 Es tan poco
시간이 흐른 뒤에 Después
오후의 사랑 Amor, de tarde
저기요 Oh
여기가 나의 집이다 Esta es mi casa
나의 풍경을 선택할 수 있다면 Elegir mi paisaje
당신에 대한 상상 Asunción de ti
카탈로그 2(Inventario dos) 1986∼1991
잎사귀 Hojas
생존자들 Sobrevivientes
조류 기르기 Avicultura
기적의 힘 Maravilla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주 Variaciones sobre un tema de Heráclito
유토피아 Utopías
세이렌 Sirena
말하자면 Digamos
하트 Il cuore
애무에 관한 보고서 Informe sobre caricias
당신의 거울은 똑똑해 Tu espejo es un sagaz
백지 Página en blanco
느리지만 온다 Lento pero viene
암/호 Santo y/o seña
40주년 Cuadragésimo aniversario
서로 다른 이름 Heterónimos
남쪽도 있다 El Sur también existe
카탈로그 3(Inventario tres) 1992∼2001
하이쿠 코너 Rincón de Haikus
작은 죽음 Pequeñas muertes
더듬더듬 A tientas
노스탤지어 Nostalgia
매스 미디어 Mass media
젖은 종이 Papel mojado
1997년 체 게바라 Che 1997
젊은이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Qué les queda a los jóvenes?
의욕 상실 Desganas
말 없는 불 Fuego mudo
사랑이 중심이다 El amor es un centro
베개 Almohadas
물물 교환 Trueque
하느님이 여자라면 Si dios fuera mujer
카탈로그 4(Inventario cuatro) 2002∼2006
유년기 Infancia
유언 Testamento
잡설 Bagatelas
가을 Otoño
부록−노래로 살아 있는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
옮긴이의 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삶이라는 전투(Esa batalla)
궤멸적인
죽음의 개념을
억누를 수 없는
삶의 열망과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을까?
닥쳐올 심연 앞에서의
공포를 찰나적인
진정한 사랑의
침략적인 기쁨과
어떻게 짝짓기 할 수 있을까?
밭으로 묘비를,
카네이션으로
낫을
어떻게 끊어 낼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이란 그런 걸까?
그 전투가 삶인 걸까?
2.
바다에 던진 병(Botella al mar)
이 여섯 행을 병에 담아 바다에 던진다
언젠가 인적 드문 외딴 해변에 닿겠지
한 아이가 병을 발견해 마개를 열고
시행 대신 조약돌과 ‘구해 주세요’와
‘조심해’와 달팽이를 꺼내겠지
그게 나의 은밀한 계획이다
3.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Por qué cantamos)
만약 매 순간이 죽음을 동반한다면
만약 시간이 도둑의 소굴이라면
대기가 더 이상 청명하지 않다면
삶이 한낱 움직이는 과녁에 불과하다면
그대는 물을 것이다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가 뭐냐고
만약 우리의 환호성에 포옹이 없다면
우리 조국이 슬픔으로 죽어 간다면
아직 부끄러움이 폭발하기도 전인데
우리 인간의 마음이 산산조각 난다면
그대는 물을 것이다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가 뭐냐고
만약 우리가 지평선처럼 멀리 있다면
만약 그곳에 나무와 하늘이 남아 있다면
만약 매일 밤은 언제나 일말의 부재(不在)이고
눈뜰 때마다 어긋난 만남이라면
그대는 물을 것이다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가 뭐냐고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강이 속삭이기 때문
강이 소곤거릴 때 / 강이 소곤거릴 때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무정한 강은 이름이 없지만
그 도착지는 이름이 있기 때문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전부이자 미래이며 민중이기 때문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과
죽은 이들이 우리가 노래하길 바라기 때문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외침만으로는 부족하고
눈물이나 분노로도 충분치 않기 때문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사람을 믿기 때문
패배를 이겨 낼 수 있기 때문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태양이 우리를 알아보기 때문
들판에 봄 내음이 가득하기 때문
이 줄기 저 열매에
모든 질문의 답이 있기 때문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밭고랑 위에 비 내리고
우리는 삶의 투사이기 때문
우리는 노래가 재가 되게 내버려 둘 수 없고
그걸 원치도 않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