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데이터 시대의 새로운 존재론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의 ‘신실재론’
영국의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 프랑스의 철학자 캉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의 ‘신실재론’은 21세기 사상을 뒤흔든 ‘실재론적 철학’의 흐름을 형성했다.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로 구현되는 데이터 시대에 실재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페라리스는 데이터가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특유의 ‘기록성’을 가진 ‘사회적 실재’라는 신실재론의 해석을 근거로 “웹 복지 시스템”의 구축을 역설한다. 디지털 데이터의 가치가 특정 플랫폼 소유자에게 독점되지 않고 모두에게 공유되게 하기 위해서다.
페라리스는 국내 독자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페라리스는 오래전부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데이터 사회의 철학을 구상한, 지금 우리 시대의 중요 철학자다. 이 책은 데카트르, 칸트, 푸코를 경유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비판, 기존 철학의 대안으로서 신실재론, 신실재론에 기초한 데이터의 자유로운 분배 등 페라리스의 사유를 10개 키워드로 소개한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
이탈리아의 철학자. 토리노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같은 대학에서 존재론연구센터[LabOnt(Center for Ontology)]를 운영하고 있다. 페라리스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로 존재론, 해석학, 미학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했다. 페라리스는 자크 데리다와 협업을 할 만큼 데리다로부터 강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페라리스는 이후 신실재론 운동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주관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서양 철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Documentality(2013), Goodbye, Kant!(2013), Introduction to New Realism(2015), Learning to Live: Six Essays on Marcel Proust(2020), Doc-Humanity(2022) 등이 있다.
200자평
마우리치오 페라리스는 ‘관념’ 혹은 ‘물질’ 둘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춰 온 기존 서구 철학 전통을 비판하고 관념과 물질의 혼합체인 ‘실재’를 새롭게 사유하는 ‘신실재론’을 주창했다. 신실재론의 ‘실재’란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모든 것으로, 여기에는 디지털 데이터도 포함된다. 페라리스는 자신의 신실재론을 바탕으로 플랫폼에 종속된 데이터 자산을 모두에게 개방하는 ‘웹 복지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 책은 데이터 시대의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한 페라리스의 철학을 10개 키워드로 소개한다.
지은이
서민규
건양대학교 인문융합학부 교수다.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뉴욕주립대학교(버팔로)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과 후기 이론인 메타실재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연구했다. 2018년 8월 토리노대학교에서 열린 국제비판적실재론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페라리스의 이론과 바스카의 이론을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때 페라리스를 직접 만났다. 저서로는 Critical Realism and Spirituality(공저, 2012), Reality and Self-Realisation: Bhaskar’s Metaphilosophical Journey toward Non-dual Emancipation(2014) 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는 “반인간주의 실재론의 가능성: 로이 바스카의 메타실재”(2020),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실재론”(2023) 등이 있다.
차례
실재론의 부활과 신실재론
01 신실재론
02 푸칸트
03 데칸트
04 굿바이 칸트!
05 티라노사우루스 실재론
06 신실재론의 형이상학
07 존재, 인식 그리고 실재
08 오브제
09 다큐멘텔리티
10 Doc-휴머니티
책속으로
그동안 홀대 받고 변방으로 밀려났던 ‘실재(reality)’가 드디어 귀환하고 있다. 실재는 관념과 물질의 혼합체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관념과 물질 중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은 지금껏 관념의 힘에 경도된 나머지 실재의 물질성을 저 멀리 던져 놓고 인간의 관념에만 집중했다.
-“01 신실재론” 중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지식-권력의 오류(fallacy of knowledge-power)’다. 그들은 어떠한 지식이더라도 그 이면에 권력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지식을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무지가 축복이라 믿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지식은 추구와 비판의 대상이 아닌 회피와 탈출의 대상이 된다.
-“02 푸칸트” 중에서
칸트는 인간에게 자신만의 인식 틀이 있기 때문에 날것으로의 경험 자체, 즉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다시 감각경험의 영역인 지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국 칸트는 필연성을 획득할 수 없고 늘 오류 가능성에 휩싸여 있는 감각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이루려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종합은 인간 이성이 탐구해야 할 결정적 영역을 남겨 두고 만다.
-“04 굿바이 칸트!” 중에서
디지털 기술과 소셜 네트워크로 대변되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록의 문서화는 더욱 적나라하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내 손 안의 단말기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그것은 수정이 불가능한 실재며,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유도하는 인과적 힘을 지닌 물자체가 되었다. 우리의 사회적 개념과 사고는 이 물자체에 의해 규정된다.
-“08 오브제” 중에서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페라리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재론자인 페라리스로서는 텍스트가 텍스트이도록 하는 원인을 해체할 수 없다. 그러나 기록성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적 실재는 텍스트의 형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페라리스는 “사회적인 어떤 것도 텍스트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데리다의 주장을 수정한다.
-“09 다큐멘텔리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