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위진남북조 시대는 특히 문학작품 창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 이론과 문학비평이 성행한 시기였다. 예를 들면 조비(曹丕)의 ≪전론(典論)·논문(論文)≫을 비롯해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와 유협(劉?)의 ≪문심조룡(文心雕龍)≫, 종영(鍾嶸)의 ≪시품(詩品)≫과 소통(蕭統)의 ≪문선(文選)≫ 및 서릉(徐陵)의 ≪옥대신영(玉臺新?)≫ 등 문학 총집의 출현은 문학 창작과 더불어 이론과 비평의 절정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심조룡≫은 위진남북조 시대까지의 문학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괄해, 올바른 글쓰기에 대한 지침을 서술한 ‘문학 창작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심조룡≫의 체제는 전체 5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요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편인 <원도(原道)>부터 <변소(辨騷)>까지의 다섯 편은 전체의 총론으로, <원도>·<징성(徵聖)>·<종경(宗經)> 편은 문학 창작에 대한 도와 성인과 경전의 합일에 대한 서술이며, <정위(正緯)> 편과 <변소> 편은 이 세 편을 보충하는 의미를 가진다. 성인이 창작한 오경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도를 표현한 것으로, 창작의 내용은 반드시 오경에서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경의 문풍은 가장 아정해 오경의 내용을 종법으로 삼으면 감정에 깊이가 있게 되고, 풍격이 맑고 순수하며, 내용이 신실하고 허구가 아니며, 뜻은 곧고 비뚤어지지 않으며, 체재는 간결하고 조리에 맞으며, 표현은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됨으로써 문학 창작에 대한 사상 예술을 완미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위>와 <변소> 편은 위서와 초사의 작품이 ‘올바른 글쓰기’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서술한 것으로, 기이한 내용은 오경의 궤도에 어긋나지만 표현이 풍부하고 아름다워 창작에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했다. 오경의 내용을 근본으로 삼고 위서의 참작과 ≪초사≫에 나타난 기이한 표현을 취해, 신기함을 참작하면서도 진실함을 잃지 않고, 화려함에 노닐면서도 그 내용을 충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인 문학작품의 창작 방법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으로 ‘창작 방법에 대한 총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명시(明詩)>부터 <서기(書記)>에 이르는 20편은 각체 문학작품 창작과 관련한 창작 방법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가지 유운문과 무운문에 대해 종류를 나누어서 구분하고, 각체 문장의 원류와 명칭의 성질에 대한 해석, 대표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가 및 체제 특색의 규격에 대한 요구를 나타내고 있다. 이상의 25편에 대해 유협은 ‘창작 강령’을 제시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사(神思)>부터 <정기(程器)>에 이르는 24편은 ‘창작 세목’을 나타낸 것으로, 광범위하게 창작 방법에 대한 각종 요소를 논했다. 즉 강건한 풍격의 수립과 진솔한 감정 표현에 대한 중요성 및 다양한 수사 기교의 추구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술했다. 유협이 중요시한 또 다른 문학작품의 ‘창작 세목’은 창작 환경의 중시와 문인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거론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문학작품 창작 방법과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정신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거론한 ‘창작 지침서’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당시는 형식을 중시한 변려문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변려문의 성행으로 위·진 시대에는 언어의 형식적인 화려한 표현에만 치우치고 내용이 진실하지 못한 경향이 농후해, 풍유의 훌륭한 작용이 결핍되어 있는 작품도 많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문학 창작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아정한 오경의 문장에 바탕을 두고 올바른 글쓰기에 대한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문심조룡≫에 나타난 일관된 주장이다.
200자평
중국 선진(先秦:B.C.12-13세기)에서 육조(六朝:6세기)까지의 중국 고대의 문학 현상을 시대 순으로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론으로 집대성시킨 중국 고대의 문학이론서이다.
지은이
유협은 자를 언화(彦和)라고 하며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쥐현(莒
縣)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그의 본적이며 그가 실제로 살았던 곳은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전커우현(鎭口縣)이다. 그의 선조가 북방 민족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조부인 유영진(劉靈眞)은 송(宋)나라의 사공(司空: 국무장관)을 지낸 유수지(劉秀之)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 유상(劉尙)은 남방에서 외지인을 관장하는 월기교위(越騎校尉)라는 관직을 지냈지만, 비교적 일찍 죽은 듯하다. 그의 모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유협도 일찍 고아가 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유협은 소년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는데, 물론 유학인 공자학파의 학문이었다. 그의 일족은 급속히 몰락해 가난 때문에 그는 결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남경 교외에 있는 정림사(定林寺)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당시 정림사에는 명승으로 알려진 승우(僧祐)가 거처하고 있었다. 이후 정림사에서 폭넓게 불경의 경론을 공부한 끝에, 제(齊)나라 영명 연간(永明年間: 483∼493), 정림사에 소장되어 있던 불경 서적의 분류 정리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제나라 옹주자사였던 소연[蕭衍, 양(梁) 무제(武帝)]은 화제(和帝)를 폐한 다음 스스로 즉위해 국호를 양나라로 칭하고 원호(元號)를 천감(天監)으로 고쳤는데, 이때가 502년의 일이다. 유협이 관직에 나아간 것은 이후의 일로 보이며, 천감 10년(511) 무렵에 동궁의 비서관인 동궁통사사인(東宮通事舍人)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동궁은 무제(武帝)의 장자인 소통(蕭統)으로, ≪문선(文選)≫의 편자로서 ‘소명태자(昭明太子)’라는 시호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양서(梁書)≫에서 “소명태자는 문학을 좋아해 유협을 매우 가까이 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문심조룡≫이라는 대저작을 바탕으로 문학상의 식견을 널리 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문심조룡≫과 ≪문선≫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문학 양식의 분류에 공통점이 적지 않아서 ≪문심조룡≫이 ≪문선≫ 편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승우의 사후에 유협은 칙령을 받고 다시 정림사의 불교 서적 정리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후 출가해 이름을 혜지(慧地)로 고쳤으며,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되어 죽었다. <양서유협전전주(梁書劉勰傳箋注)>에서는 그의 몰년이 무제의 보통(普通) 연간 초기인 521년부터 523년 사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465년 전후에 태어나 520년에 향년 56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옮긴이
성기옥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심조룡≫의 문학 창작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 대학에서 중국 고전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통합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는 ≪논형-구허.삼증≫, 편서로는 ≪문질빈빈의 벼리≫ 외 다수가 있고, <≪문심조룡≫에서 논한 문학 창작의 양대 강령>과 <주석을 통한 ≪문심조룡·정위≫ 편의 의의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원도 제1
징성 제2
종경 제3
정위 제4
변소 제5
명시 제6
악부 제7
전부 제8
송찬 제9
축맹 제10
명잠 제11
뇌비 제12
애조 제13
잡문 제14
해은 제15
사전 제16
제자 제17
논설 제18
조책 제19
격이 제20
봉선 제21
장표 제22
주계 제23
의대 제24
서기 제25
신사 제26
체성 제27
풍골 제28
통변 제29
정세 제30
정채 제31
용재 제32
성률 제33
장구 제34
여사 제35
비흥 제36
과식 제37
사류 제38
연자 제39
은수 제40
지하 제41
양기 제42
부회 제43
총술 제44
시서 제45
물색 제46
재략 제47
지음 제48
정기 제49
서지 제50
찬양하노라
원문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건안(建安) 시대의 ‘애사’는 오직 서간(徐幹)의 작품이 매우 뛰어났다. 조식(曹植)이 어린 둘째 딸의 죽음에 즈음해 쓴 <행녀애사(行女哀辭)>를 살펴보면, 문장 속에서 비통하고 슬픈 마음을 볼 수 있다. 반악(潘岳)이 뒤를 이어 창작한 데 이르러서는, 실로 ‘애사’의 아름다움을 한곳에 그러모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생각이 주밀하면서도 표현에는 변화가 많으며, 감정은 비통함과 고통스러움을 꿰뚫고 있다. 일에 대한 서술 방법은 ‘사전(史傳)’의 체제이며, 표현 구성은 ≪시경≫ 시인의 표현 방법을 모방했다. 사언구로 이루어진 리듬의 진행은 비교적 빠르며, 리듬이 완만하고 느슨한 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뜻은 솔직하게 나타내었으면서도 표현은 곡진하며, 형식은 옛날을 따랐으면서도 정취는 새로운 느낌이 있다. 자신의 딸 금록(金鹿)의 죽음에 즈음해 쓴 <금록애사(金鹿哀辭)>와 임자함(任子咸)의 딸의 죽음에 즈음해 쓴 <택란애사(澤蘭哀辭)>를 살펴보면,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그러한 표현이어서 혹여 누가 계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