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문일평(1888∼1936)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기의 언론인이자 역사가, 교육자였다. 500년 조선 왕조가 역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무너져 가고 일제에 의한 한민족 약탈과 침탈의 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는 한국의 외교와 정치사, 과거 서적들과 문화 등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만주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대한 관심하에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역사에 녹아 있는 민족정신의 탐구에 평생을 바친다. 그게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었다.
그는 민족정신의 정수가 드러난 역사적 사실, 인물, 대상은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일관되게 평가하고 그 의미를 추출하려 애썼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의 접근은 역사적 사실 자체의 문헌학적, 고증의 태도가 아니라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특징과 정수를 찾아내고 이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등에 보다 중심을 둔 접근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역사학을 위한 역사학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시대 현실 극복의 방안으로서의 역사학이었던 셈이다. 역사를 고루한 골방에서의 작업으로 한정 짓기를 거부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주제를 쉽고 평이한 문체로 짧은 문장으로 구성해서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역사적 편린들에서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바꾸어 낼 교훈과 깨달음을 찾기 위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역사적 지층의 가장 아래에 있는 두터운 먼지를 털어 내는 작업과도 유사하다. 세세한 풍속과 인물사는 그의 손을 거쳐 기록으로 남겨지고 쌓여 그 합당한 가치를 드러낼 시간을 기약했다.
200자평
문일평은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글은 짧고 쉬운 문장을 통해 역사를 고루한 골방에서 일반 대중에게로 인도한다.
지은이
호암(湖岩) 문일평은 1888년에 평안북도 의주, 아버지 문태두와 어머니 해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9년 열두 살 때에 결혼하고 17세까지는 의주에서 주로 한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18세가 되던 해에 일본 도쿄로 가서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 1학년 청강생으로 들어갔지만 곧 그만두고 간이 강습소에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 그 후 1906년 10월에 <자유론>이란 글을 ≪태극학보≫ 3월호에 처음 발표한다. 이어서 1907년 7월에는 같은 ≪태극학보≫ 11호에 <진보의 삼단계>를, ≪태극학보≫12호에는 <한국의 장래 문명을 논함> 등을 차례대로 발표한다. 그는 1908년 귀국해서 평양의 대성학교, 서울의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10년 한일 합병이 되자 1911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와세다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해 공부한다.
1912년이 되자 그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해 조직한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1914년에는 다시 귀국해 농사를 지으면서 집안을 돌보거나 독서 등을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그는 1919년 3월 12일에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 보신각에서 낭독하는 일을 벌이고 이로 인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1920년 서른세 살이 되던 해,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뒤에 동아일보에 한시 <삼각산>을 발표하고, 9월에는 <이충무전>을 번역해 잡지 ≪서울≫에 게재한다. 1920년대 문일평은 신간회나 조선 물산 장려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관심을 보여 준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중화해 소개하는 글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1929년 조선일보에 <조선인과 국제안>을 17회에 걸쳐 연재하며 6월에는 역사 사설 <천고비극의 주인공 백제 의자왕의 최후>를 ≪삼천리≫에 발표하고 논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조선사에 나타난 국제적 결혼과 정략>, <조선 문화에 대한 일고찰>, <예술과 로맨스> 등을 차례대로 발표한다. 그는 1931년에 조선일보사를 사임하고 중앙고보에 역사 교사로 부임하지만 오래 하지는 않고 1933년 4월에 다시 조선일보사에 편집 고문으로 재입사하게 되고 이후 타계할 때까지 그의 주요한 글들을 대거 집필한다.
1933년에 조선일보에 <사안으로 본 조선>을 9회에 걸쳐 연재하며 <세계문화의 선구>, <사외이문> 등을 발표하고 1934년에는 외교 사설 <한미 관계 50년사>를, 1935년에는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에 <사상에 나타난 예술가의 군상>, 수필 <나의 반생>, <고증학상으로 본 정약산>을 쓴다. 이어서 1938년에는 <조선 문화사의 별항>, <문화적 발굴> 등을 집필한다. 열정적으로 집필 활동을 진행하던 중 문일평은 1939년 4월 3일, 갑자기 급성 단독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가 사망한 후에 1939년 ≪호암사화집≫이 이원조의 도움으로 전집에 앞서 인문사에서 출간되고 이어서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호암전집≫ 전 3권이 나온다. 그리고 1940년에는 조광사에서 ≪호암전집≫이 재간행되고 ≪소년 역사 독본≫이 이어서 간행된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48년이 되어서는 일성당서점에서 증보 발행된다.
엮은이
이훈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청준 소설의 알레고리 기법 연구>(1999)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7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평론으로는 <지옥의 순례자, 역설적 상실의 제의−편혜영론>, <부재, 찰나, 생성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냉장고를 친구로 둔 인간, 피뢰침이 된 인간>, <생의 환상, 공전의 미학−박완서론>, <사랑을 부르는 매혹적 요구>, <부정의 부정−허혜란론>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丁卯胡亂
史眼으로 본 朝鮮
李朝 文化史의 別貢
丙子를 通해 본 朝鮮
文化的 發掘
담배 考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世宗께서 創造하신 文化는 朝鮮我에 눈뜬 第一步이니만치 그것이 곧 朝鮮 思想의 淵源을 지였다. 우리네 固有한 言語를 적기 爲하여 獨特한 文字를 創造함과 같음은 久遠한 朝鮮 文化에 있어서도 가장 推稱할 만한 朝鮮 思想의 高貴한 發露이다.
다만 朝鮮 思想이 그때나 이때나 무슨 體系를 가진 獨特한 思想은 아니다. 그러나 支那 思想 그것도 아니오 印度 思想 그것도 아니오 朝鮮 思想은 어대까지 朝鮮 思想이다. 비록 예로부터 朝鮮이 支那 印度 思想의 感化를 많이 받었으나 特殊한 環境에서 特殊한 生活을 하게 된 朝鮮人은 久遠한 歷史를 通하여 一種 特殊한 朝鮮心을 形成함에 이른 것으로서 그것이 世宗에게 依하여 가장 具體的으로 表現된 것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世宗을 朝鮮心의 代表者라 부르고 싶다.
<史眼으로 본 朝鮮>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