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즐거운 문화정치학’,
페미니즘의 새로운 길을 열다
여성은 흔히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무기력한 희생자로 그려진다. 그러한 이미지가 불러오는 우울함과 패배감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미셸 바렛은 상상력 가득한 ‘즐거운 문화정치학’에서 활로를 찾는다. 창의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론적 실천들로 관습적 사유에 도전하는 문화적 환경을 마음껏 상상한다. 바렛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주의의 현대 이론들을 두루 경유해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가족, 생물학에 기반하지 않는 섹슈얼리티, 대중문화와 공상과학물이 인간 본성을 다루는 방식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이처럼 풍성한 바렛의 작업은 우리 삶을 둘러싼 문화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기존 이론이나 지식을 통해 당대 현실을 더 잘 이해해 보려 하는 학자이자 실천가인 바렛을 열 가지 키워드로 소개한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을 모색하던 바렛이 ‘차이’의 페미니즘으로 관심사를 전환한 까닭, 바렛이 조명한 비평가로서 버지니아 울프의 면모, 전쟁과 인종차별의 얽힘에 대한 바렛의 이론화 등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다. 지식과 현실을 단단히 결합하는 바렛에게서 문화 이론과 페미니즘의 미래를 발견해 보자.
미셸 바렛(Michèle Barrett, 1949∼ )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문화 이론가, 버지니아 울프 연구자다. 현재 런던대학교 퀸메리칼리지의 명예교수로, 현대 문학과 문화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의 여성 억압: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분석의 문제점들≫(1980)에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가능성을 부단히 모색했으나, 알튀세르와 푸코를 접하면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다. 이후 이데올로기와 담론, 재현 개념을 중심으로 ‘차이’의 페미니즘과 문화 이론에 천착했다. 버지니아 울프 에세이 모음집을 발간해 울프 문학의 유물론과 페미니즘을 최초로 소개했다. 최근 몇 년간 <울프 노트 프로젝트>에 참가해 울프의 미출간 기록물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데 전념해 왔다. 2020년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전쟁과 인종차별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는 등 지식을 현실과 결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0자평
풍부한 상상력으로 관습적 사유에 도전하는 미셸 바렛의 문화정치학을 해설한다. 바렛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포스트주의의 현대 이론들을 두루 경유해 가족, 섹슈얼리티, 인간 본성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을 조명하고 전쟁과 인종차별의 얽힘을 이론화한다. 바렛이 정초한 ‘즐거운 문화정치학’에서 현실과 단단히 결합한 지식을 톺아본다.
지은이
하수정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전담교수로 재직하며 실용 영어를, 대구대학교에서는 문학과 영화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문학 비평, 문화 이론에 관심이 있다. 공동 번역서로 장자크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2016)와 미셸 바렛의 ≪다시 보는 여성학: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만남≫(2005)이 있다. 논문으로는 “도시 산책자의 눈에 비친 두 도시: 벤야민의 파리와 울프의 런던”(2022), 스피박의 관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을 살펴본 “≪포(Foe)≫와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재현으로서의 침묵”(2021), 지역 학술지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연구 동향을 분석한 “페미니즘 연구에 관한 비판적 고찰: ≪영미어문학≫을 중심으로”(2019), 문화 비평가로서 버지니아 울프를 분석한 “문학/문화 비평가로서 버지니아 울프”(2009) 등이 있다.
차례
실천적 이론가 미셸 바렛
01 젠더 이데올로기
02 가족
03 섹슈얼리티
04 페미니즘들
05 포스트주의
06 담론과 진실
07 인간 본성
08 문화정치학
09 버지니아 울프
10 전쟁
책속으로
신부가 아버지의 손에서 신랑의 손으로 넘겨져 다른 가족의 아내가 되는 결혼식은 21세기에도 익숙한 풍경이다. 현실 속 많은 아내가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남편의 가족까지 문자 그대로 ‘먹이고 살리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는 말은 왠지 아직도 남성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처럼 여겨진다. 여성이 가족에 투여하는 시간과 노동과 정서는 남성의 그것들에 비해 그다지 값지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렛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전유해, 산업자본주의와 더불어 발달한 핵가족 형태의 남성 생계부양자ᐨ여성 양육자 모델을 가족ᐨ가구 체계라는 용어로 분석한다.
_“02 가족” 중에서
바렛은 국가가 섹슈얼리티와 생식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바렛에 따르면 국가는 결혼, 이혼, 가정 내 폭력, 강간, 매춘, 포르노, 근친상간, 동성애, 사춘기 여성 난교 등 모든 부문에서 공과 사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개입한다. 국가는 섹슈얼리티를 규제하는 법적 규약뿐 아니라 섹슈얼리티의 문화적 재현에도 일정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어떤 때는 제한하고 어떤 때는 장려하는 온갖 형태의 출산 정책, 이성애 부부에게 유리한 주거 정책과 의료 보건 정책, 동성애 결혼 금지, 포르노에 대한 검열 기준 마련 등은 국가와 개인 섹슈얼리티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 준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실행 가능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_“03 섹슈얼리티” 중에서
바렛은 이처럼 인기 있는 공상과학물 상당수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성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문제를 지향하며, 그중 다수는 인간의 존재와 그 조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세속의 시대에 종교의 대체물로 기능한다”고 분석한다. 이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존 방식으로 보편적 인간성을 정의하거나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한 바렛의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_“07 인간 본성” 중에서
바렛은 두 작품이 오늘날 페미니즘이 당면한 평등과 차이의 문제를 잘 구현한다고 본다. 1929년에 출간된 ≪자기만의 방≫에서 양성적 상태를 주장하던 울프가 1938년에 출간된 ≪3기니≫에서는 ‘사회적 아웃사이더’로서 여성이 지닌 차이의 힘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분석한다. 바렛의 울프 에세이 선집 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 그러했듯 전 세계 울프 연구자들에게 선구적 작업으로서 큰 영향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바렛은 울프를 신경쇠약증에 걸린 예민한 모더니스트 소설가라는 이미지에서 구출해 비평가, 서평가, 페미니스트, 강연자로서 울프의 정치적 글쓰기를 복원하고 재평가한다.
_“09 버지니아 울프” 중에서
달링은 영광스러운 승리자이자 생존자로 ‘분류’되었지만 어찌 보면 그는 그저 뒤늦게 사망했을 뿐인 전사자일지도 모른다. 바렛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차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은 오랫동안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일이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바렛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동안 전쟁은 사상자 목록, 묘비, 전쟁 기념관이 아니라 더 광범한 인간적 결과의 관점에서 조명되기 시작했다. 바렛은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전쟁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_“10 전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