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박태순은 왜곡된 근대화의 단면과 그에 맞서는 민중적 삶의 활력과 가능성을 지식인 특유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포착했다. 이 책에 실린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삼두마차〉, 〈단씨(段氏)의 형제들〉은 4·19혁명, 1960∼1970년대의 산업화 현실,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가 끊임없이 비판하고 고민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무너진 극장〉은 4·19 세대의 체험을 집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혁명의 열기와 그것이 좌절한 이후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소설이다. 소설은 4·19가 일어난 지 엿새 후인 4월 25일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임화수의 평화극장을 부수러 가는 군중들의 대열에 합류해 겪은 시위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무너진 극장〉에 드러난 사회적 관심사는 ‘외촌동’ 연작을 통해 도시 빈민의 삶에 대한 구체적 천착으로 나타난다. 〈정든 땅 언덕 위〉로 대표되는 외촌동 연작은 무허가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시 외곽의 문제들이 급격하게 생성되기 시작한 한국의 1960년대적 상황을 포착했다.
〈삼두마차〉는 박태순 소설 특유의 지식인적 풍자와 사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허생을 패러디한 인물로 보이는 주인공 허술은 아내의 독촉에 못 이겨 세상으로 나오지만 허생과 달리 타락한 세태 현실에 영합해 가며 다른 행로를 걷는다. 작가는 당대 사회의 부패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물인 허술을 통해 시대에 대한 비판을 날카롭게 담아낸다.
〈단씨(段氏)의 형제들〉에서는 1960년대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공황감과 도덕적 혼란을 비판적으로 묘파했다. 주인공 단기호는 윤락녀로 전락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거대 도시의 체제 속에 아무런 현실적 응전력을 지닐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을 실감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본 아버지는 내연녀와 함께 시내의 변두리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결국 도시의 일상에 맞서 단기호가 선택한 것은 강원도에 내려가 공사 노무자로 일하면서 자유롭게 떠도는 “건강한 촌놈”의 삶이다.
박태순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 후 한국 사회가 통과해 온 근대화 과정에 대한 줄기찬 비판과 성찰이다. 그의 소설은 산업화 시대에 움트기 시작한 개인성의 자각과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동시에 탐색해 보이는 중요한 성취다.
200자평
4·19 세대의 역사의식과 민중적 연대의 가능성을 그리는 작가 박태순의 단편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삼두마차〉, 〈단씨(段氏)의 형제들〉을 엮었다. 그는 4·19 혁명과 1960∼1970년대의 산업화 현실,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등 한국 사회가 통과해 온 근대화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성찰한다.
지은이
박태순(朴泰洵)은 1942년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했다. 이후 해주에서 살다가 1948년 월남해 서울에서 살게 된다. 서울로 이사 와서 다섯 군데나 학교를 옮겨 다니는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월남 난민으로서 체험한 소외와 빈곤의 문제가 자신의 문학적 체험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전쟁 후 1954년 대구 피난지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옮겨와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는 고교 시절 문천회, 바우회 등의 독서 클럽에 가입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드러내게 된다.
1960년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맞이한 4·19 혁명은 작가에게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일깨우는 큰 충격이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같은 세대였던 김승옥 이청준, 김광규 등을 만나 서로의 작품을 합평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으며, 김승옥, 김치수, 염무웅, 김주연, 이청준이 주축이 되어 간행한 《68문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절 한동안 무허가 철거 난민촌에서 생활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경험을 작품화하는 과정에 몰두했으며 문학이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소설가로서 박태순의 첫 활동은 1964년 권중석이라는 이름으로 응모한 단편 〈공알앙당〉이 《사상계》 신인상에 가작 입상하면서 시작되었다. 196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향연〉과 〈약혼설〉로 가작 입상한 후 같은 해 《세대》의 제1회 중편소설 공모에 〈형성〉이 당선되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월남 난민과 도시 변두리의 삶을 바탕으로 한 박태순의 소설은 4·19를 겪은 세대로서의 현실 인식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소재들을 아우르게 된다.
4·19 세대의 문학적 체험과 도시 빈민의 삶을 소설화했던 작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대 현실에 연결되는 사회적 발언을 르포적 글쓰기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화시장 주변을 직접 답사하면서 써 낸 〈분신−전태일〉(1970)과 〈광주단지 3박 4일〉(1971)은 사회의 모순에 대응하는 문학의 입장을 선명히 드러낸 기록들이다. 1974년 ‘문인 61인 선언’ 발기를 시작으로 하여 1974년에는 고은, 장용학, 백도기, 이문구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적극적인 실천 활동에 나서게 된다. 1975년 절필 선언을 하기도 했으나 1977년 《세대》에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을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1979년 무크지 《실천문학》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지식인 선언에도 동참한 작가는 사회적 실천과 연계된 문학 활동을 지속해 왔으며, 1988년에는 중편 〈밤길의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출간된 박태순의 작품은 소설집으로는 《무너진 극장》(정음사, 1972), 《정든 땅 언덕 위》(민음사, 1973), 《단씨의 형제들》(삼중당, 1975), 《신생》(민음사, 1986)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낮에 나온 반달》(삼성출판사, 1972),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열화당, 1977), 《어제 불던 바람》(전예원, 1979),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심설당, 1980) 등이 있다. 선집으로는 《낯선 거리》(나남, 1989), 《정든 땅 언덕 위−한국소설문학대계》(동아출판사, 1995), 《무너진 극장》(책세상, 2007)이 있고, 비평집 및 산문집으로는 《민족의 꿈, 시인의 꿈》(한길사, 1986), 《국토와 민중》(1983), 《나의 국토 나의 산하 1−3》(한길사, 2008) 등이 있다.
엮은이
백지연(白智延)은 문학평론가이고, 현재 서울여대 초빙강의교수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평론집으로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공저서로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페미니즘 문학비평》, 《한국문학과 민주주의》,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 공편서로 《20세기 한국소설》 등이 있다.
차례
무너진 극장(劇場)
정(情)든 땅 언덕 위
삼두마차(三頭馬車)
단씨(段氏)의 형제(兄弟)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그 타종(打鐘)의 울림을 새로운 세대였던 우리가 거느리고 나타날 수 있었음은 그 얼마나 행복하며 영광되며 축복스러웠던 것인지? 그러나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갔으며,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한순간의 흥분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기억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어느덧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힘들여 끌어올렸던 그 무질서의 위대한 형식이 역사성 속의 미아처럼 다만 한순간의 고립에 불과하고 말았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느덧 저 기성의 제복을 걸쳐 입고 있음을 보았다.
− 〈무너진 극장(劇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