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주네가 5년 절필 끝에 발표한 첫 희곡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던 사르트르가 ≪성 주네≫를 출간하자 부랑자 생활에 절도를 일삼다 수감되기를 반복하던 주네에게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에 부담을 느낀 주네는 절필을 선언했다. <발코니>는 주네가 절필을 선언한 지 5년 만에 침묵을 깨고 발표한 첫 희곡이었다. <발코니> 이후 주네는 확연히 달라진 창작 세계를 보여 준다. 이전까지는 주로 자전적인 요소를 소재 삼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주력했던 주네가 <발코니>이후 작품에서 분명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표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네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작품
사창가에서 벌어지는 음란한 역할극, 그 바깥에서 고조되어 가는 혁명의 분위기, 혼란 속에서 가상과 현실 세계가 뒤섞이면서 사창가의 주인이자 지하 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이르마는 현실 세계의 여왕을 대신하게 된다. 주네는 이 작품에서 서구사회를 돈과 육체가 맞교환되는 장소, 속임수와 환상이 지배하는 장소로 보고 호화스런 사창가에 비유했다.
프랑스 검열 당국이 이 문제작의 공연을 허락할 리 없었다. 초연은 이듬해에야 영국에서 피터 자데크의 연출로 이루어진다. 주네는 <하녀들>에서 만족스러운 연출력을 보여 줬던 피터 자데크의 공연에 기대를 걸었지만 초연 당일 공연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는 소동을 벌였다. 연출 방향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본국에서의 초연은 현대연극사상 가장 위대한 연출가로 평가되는 피터 브룩이 맡았다. 그와 동시에 런던, 베를린, 빈과 밀라노 등 전 유럽에서 <발코니>가 공연되었고, 각지에서 공연되자마자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더욱이 피스카토르, 로제 블랭, 조르지오 스트렐러, 리처드 셰크너 등 당대 최고의 연출가들이 <발코니> 무대화에 도전했다. <발코니>는 주네의 인지도를 전 세계적으로 드높여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발코니>에 대한 주네의 각별한 애정
<발코니>는 명연출가들의 손끝에서 세련된 무대로 형상화되었지만, 주네가 이들 공연에 늘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피터 브룩의 파리 초연은 주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결국 주네는 ‘어떻게 <발코니>를 공연해야 하나’라는 글을 써서 자신의 불만을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62년 이후로는 책을 출판할 때 이 글을 아예 서문으로 싣도록 했다.
게다가 주네는 1956년 작품을 발표한 이래 10년에 걸쳐 개작과 수정을 거듭한다. 1962년 수정본을 출간하면서 이를 “결정본”이라고 못 박았지만 1968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전집을 출간하면서 주네는 또 한 번 <발코니>를 수정했다. 주네는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쉼 없이 작품을 고치고 수정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이런 각고의 노력은 <발코니>에 대한 주네의 애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보여 준다.
국내 초역으로 출간한다.
200자평
장 주네는 현대 연극사상 가장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절도 등 각종 경범죄로 수감되어 수형 생활 중에 시집 ≪사형수≫를 출간하며 등단했다. 프랑스 지성계는 천재 시인의 등장에 환호했고 사르트르는 ≪성 주네≫를 써서 주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평생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주네에게 세간의 이런 관심은 독이 됐다. 주네는 절필을 선언하고 오랫동안 침묵한다.
주네가 5년 만에 침묵을 깨고 발표한 첫 작품이 바로 <발코니>다. 이전까지 주로 자신이 속한 범죄 세계, 수형 생활, 동성애자로서 경험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는 데 주력했던 주네는 이 작품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피스카토르, 피터 브룩 등 당대 최고의 연출가들이 <발코니> 무대화에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주네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된다.
초역이다.
지은이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는 1910년 12월 19일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22세의 가정부였던 어머니는 생후 7개월 된 주네를 빈민구제국에 넘긴다. 이후 주네는 모르방의 한 농가에서 좋은 위탁 부모 아래 성장한다. 하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직업학교를 탈출한 뒤 자잘한 절도와 부랑 등 일탈을 일삼다 16세 때는 결국 감화원에 들어간다. 감화원에서 출소한 뒤로도 절도 등 자잘한 범죄로 수감된다. 그러다 1942년 감방 동료의 도움으로 첫 시집 ≪사형수≫를 출판하는데 이를 계기로 장 콕토를 후원자로 만난다. 콕토의 후원에 힘입어 ≪꽃의 노트르담≫, ≪장미의 기적≫ 등 소설 출판이 성사되었고, 1947년에는 루이 주베 연출로 ≪하녀들≫의 초연, 그리고 1949년에는 ≪엄중한 감시≫와 ≪도둑 일기≫의 출판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계속된 범죄 등으로 종신형과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때마다 콕토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구명 노력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마지막 유배형 위기 때 콕토, 사르트르, 피카소 등의 탄원으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냄으로써 기나긴 범죄 이력을 끝맺는다. 이후 꽤 긴 공백기 끝에 1956년 ≪발코니≫, 1958년 ≪흑인들≫, 1961년 ≪병풍들≫을 차례로 발표한다. 이후 주네는 작품 발표보다는 현실 참여에 적극성을 보인다. 미국의 쿠바 개입이나 베트남 전쟁, 남아공 인종 차별 정책을 비난하고, 68 학생 시위 때는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한다. 1970년 11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를 만나 아랍에 체류하다 1986년 유작 ≪사랑에 빠진 포로≫ 교정 작업 도중 파리의 작은 호텔에서 생을 마쳤다.
옮긴이
이선화는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박사과정(DEA)을 수료하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 유럽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핑퐁≫(연극과 인간, 2006), ≪지옥의 기계≫(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현대 프랑스 연극 1940-1990≫(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막베트≫(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죄지은 어머니≫(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왕은 즐긴다≫(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세비야의 이발사≫(도서출판 b, 2020), ≪피가로의 결혼≫(도서출판 b, 2020) 등을 번역했다. 공저로는 ≪프랑스 문학과 여성≫(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현대 프랑스 문학과 예술≫(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이 있다.
차례
어떻게 <발코니>를 공연할 것인가
나오는 사람들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주교 : (여인에게) 정말 그런 죄를 범했던 거냐?
여인 : 네.
주교 : 정말로 그런 소행을 저질렀단 말이야? 그 모든 소행을?
여인 : 네.
주교 : 그 얼굴을 쳐들고 나한테 다가왔을 때, 그리 환히 빛나던 것도 욕정의 불꽃 때문이었던 거고?
여인 : 네.
주교 : 그럼 네 죄를 사하기 위해 반지 낀 내 손이 네 이마에 가 닿았을 때도.
여인 : 네.
주교 : 내 눈길이 너의 아름다운 시선에 머물렀을 때도?
여인 : 네.
이르마 : 저 애의 어여쁜 눈길 속에 회개의 빛이 보이지 않던가요, 주교님?
주교 : (일어서며) 얼핏 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빛을 찾을 수 있었겠소? 죄를 탐하는 욕망으로 이글거리는데. 악이 넘쳐흘러 순식간에 그녀에게 세례를 퍼붓고 있더군. 커다란 눈망울은 나락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의 창백한 그림자가, 그렇소, 이르마 부인, 창백해지다 못해 얼굴은 생기 넘치도록 빛나고 있었소. 그렇더라도 우리의 신성함은 네 죄를 사하여 주는 데 있느니라. 설령 그것이 꾸며 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여인 : (갑자기 교태를 부리며) 만약 제 죄가 사실이라면요?
주교 : (덜 연극적인 다른 말투로) 제정신이야! 설마 네가 이 모든 걸 실제로 저지른 건 아니겠지.
이르마 : (주교에게) 저 애 말은 듣지 마세요. 죄악에 대해서라면 염려 놓으셔도 돼요. 여기선 어떤 죄악도…
-14-15쪽
이르마 : 변두리 일꾼들 동네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우리 업소로 흘러드는 남자들도 늘게 될 거야…
카르멘 : 남자들이라고요?
이르마 :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런 치들도 있다는 거지. 거울과 샹들리에라면 사족을 못쓰는 인간들 말이야. 언제나 똑같은 사람들이지. 하긴 뭐 여자보다는 영웅 되는 걸 선택하는 치들도 있긴 하다만.
카르멘 : (씁쓸하게) 여자요?
이르마 : 여자가 아니면 너희를 뭐라고 불러 줄까, 우리 애들이라고 해 줄까, 우리 빈껍데기 자궁들이라고 해 줄까? 어쨌거나 너희가 없으면… 그자들도 씨 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겠어?
카르멘 : (그녀는 감탄하면서 동시에 아첨하는 태도로) 부인한텐 부인만의 축제가 있잖아요.
이르마 :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연극 놀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서글프고 우울한지 아니! 그나마 나한테 보석들이 있으니 망정이지. 특히나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는 말이야. (몽상에 잠긴 듯) 그래, 나한테 나만의 축제가 있듯이… 너한테도 마음속에 향연이 있잖니…
-7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