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방인근은 1920년대부터 1975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남기며 끊임없는 창작의 열정을 드러낸 작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 작품을 제외한 대다수가 통속 대중소설로 분류되면서 문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책에서는 1920년대 발표한 순수 단편소설 <눈 오는 밤>, <어머니>, <살인>, <자동차 운전수>, <마지막 편지>를 소개한다.
‘벽파생(碧波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눈 오는 밤>은 고백 한번 못 해 보고 남몰래 애태우던 사랑이 엇갈린 인연으로 좌초할 운명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창조사에서 제2회 원고를 분실하면서 ≪창조≫에 1회가 실리는 것으로 끝났다.
<어머니>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가난한 고학생 ‘나’가 혼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당시 청년들이 결혼에 대해 가졌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살인>은 ‘실연’과 ‘배신’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동경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를 탄 숙희는 은연중에 옆 자리 남자 석찬을 사이에 두고 그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숙희를 경계하는 경자와 삼각관계에 놓이게 된다. 거칠 것 없는 경자의 태도에 줄곧 소외감과 경쟁심을 느끼던 숙희는 하관에서 헤어진 그들의 정다운 모습을 상상하며 질투에 괴로워한다.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석찬이 숙희를 찾아와 숙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여 그들은 깊은 관계까지 맺고 숙희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석찬이 이미 경자와 결혼한 사이이며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숙희는 수소문 끝에 그들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인다.
<자동차 운전수>는 ‘자동차 운전수’라는 직업의 인물을 내세워 당시 조선 사회를 진동시켰던 ‘돈’이라는 소재에 접근하고 있는 소설이다. 자동차 운전수로서 맞이하는 첫 번째 월급날, 육십 원의 돈을 받아 든 ‘나’는 갚아야 할 빚을 헤아리다가 충동적으로 그 돈을 술 마시고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등을 구입하고, 동료 운전수들에게 한턱내는 데 써 버린다. 새 양복을 빼입고 기생들의 환심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나’는 원하던 대로 명월관 기생들을 손님으로 태우게 되지만 오로지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부잣집 사내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기생들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다. 이로 인해 단꿈에 취해 잠시 망각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상기하고 가정에서 배를 곯아가며 자신을 기다릴 처자식이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피곤하고 고단한 아내가 월급 액수만으로 반색하는 모습에 ‘나’는 차마 그 돈을 다 써 버렸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양복을 무를까 고민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마지막 편지>는 사랑‘했던’ 여성에게 ‘나’가 보내는 서간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마지막으로 애인을 만났던 나흘 전 밤, ‘나’는 애인과 사랑을 속삭이던 끝에 청혼까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애인이 ‘조형식’이라는 남성에게 쓴 연애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나’의 애인은 이 편지 속에서 자신을 ‘거지 문사’로 표현하며 자신과의 연애 소문을 부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형식과 혼인까지 약속하고 있었다. 애인이 떠난 자리에 남아 슬픔과 분함으로 통곡하던 ‘나’는 그날 밤차로 서울을 등지고 시골집으로 내려와 며칠간 마음을 정리한 후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되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200자평
대중문학 작가라는 수식어에 갇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작가 방인근의 초기 단편 <눈 오는 밤>, <어머니>, <살인>, <자동차 운전수>, <마지막 편지>를 엮었다. 방인근의 초기 소설은 1920년대 시대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당시 ‘청년’의 감상과 고민, 시대 인식을 담아냈다.
지은이
춘해(春海) 방인근은 189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를 거쳐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9세기 태생의 마지막 문인으로 1975년 1월 1일 삶을 마감할 때까지 전 생애에 걸쳐 100여 권의 소설 작품을 남긴 다작(多作)의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통속대중소설로 분류됨에 따라 방인근은 문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방인근에 대해 기존의 문학사는 작가로서가 아닌 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의 창간자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1924년 창간된 ≪조선문단≫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종합 월간 문예지로, 같은 시기 문단을 풍미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문학파의 거점 역할을 했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이었던 방인근은 처남인 전영택과 이광수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재(私財)를 내어 이광수를 주재(主宰)로 한 문예 잡지 ≪조선문단≫을 창간했다. 당시 ≪조선문단≫은 최서해, 채만식, 박화성, 이장희 등의 문인을 배출한 문단의 등용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물레방아>, 현진건의 <B 사감과 러브레터>,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등 수많은 문제작들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함으로써 한국문단의 육성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광수에 이어 5호부터 방인근 자신이 편집을 주도하다가 1926년 재정난으로 판권을 남진우에게 넘기기까지 방인근은 ‘황금시대’를 구가한 ≪조선문단≫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방인근은 1927년 숭덕중학(崇德中學)에서 교편을 잡고, 1929년에는 기독교신보사(基督敎申報社)에 입사해 일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문예공론(文藝公論)≫ 편집장(1930), ≪신생(新生)≫ 편집장(1931), ≪시조(時兆)≫ 편집장(1935) 등을 역임하면서 잡지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1954년에는 춘해프로덕션 사장을 맡으며 영화에 잠시 간여하기도 했다.
작가로서 방인근은 초기에 <하늘과 바다>(1923) 등의 시를 쓰기도 했으나 소설로 전향하여 <눈 오는 밤>(1920), <어머니>(1924), <비 오는 날>(1924), <살인(殺人)>(1924), <죽지 못하는 사람들>(1925), <자동차 운전수>(1925) <마지막 편지>(1925), <최 박사>(1926), <강신애>(1926) 등 30여 편의 단편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방인근이 본격적으로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들어 신문에 대중소설을 연재하면서부터인데, ≪마도(魔都)의 향불≫(1932), ≪방랑의 가인≫(1933), ≪쌍홍무(雙紅舞)≫(1936)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이다. 해방 후에도 ≪인생극장≫(1954), ≪청춘야화≫(1955) 등 애정, 추리, 탐정을 소재로 한 통속 대중소설에 몰두해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도 <금십자가(金十字架)>(1932) 외 몇 편의 희곡과 <농민문학과 종교문학>(1927) 등의 평론이 있다.
당대의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음에도 문학사에서 작가로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 방인근,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1954년 가산을 정리해 설립한 춘해프로덕션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그가 발표한 소설들이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판매되지 못했던 탓에 삶이 피폐해졌던 것이다. 숱한 연애 편린과 전설적인 주당(酒黨), 잡지 발간자, 대중소설로 이름을 알렸으되, 문학사로부터 그 이름 앞에 작가라는 명예로운 직함을 부여받지 못했던 풍운아 방인근은 1975년 파란만장하고 자유분방했던 생을 조용히 마감한다.
엮은이
임정연은 이화여자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국어문화원 박사 후 연구원(Post-Doc)과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학위 논문 <1920년대 연애담론 연구−지식인의 식민성을 중심으로>는 ‘연애’라는 미시적 코드를 통해 근대 문학의 식민지 근대성을 탐색하고 성찰하려는 시도로, 이후 지식의 유통과 모럴(moral)의 형성, 문화의 소비 방식이라는 박사 논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후속 연구를 진행했다. <1930년대 초 소설에 나타난 연애의 모럴과 감수성>, <임노월 문학의 악마성과 탈근대성>, <근대 소설의 낭만적 감수성−나도향과 노자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등은 근대 소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반영한 연구 성과다.
현재 ‘여행’이라는 테마를 통해 젠더 정체성과 장소 정체성이 맺는 상호 관련성을 규명하고 문화 번역 텍스트로서 여행 서사를 계통적으로 독해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파리’의 장소 기억을 통해 본 나혜석의 구미 여행의 함의>, <망명 도시의 장소 상실과 좌초하는 코즈모폴리턴의 초상−주세죽과 상해, 그리고 모스크바>, <1950−80년대 여성 여행 서사에 나타난 이국 체험과 장소 감수성>, <여성의 해외 거주 경험과 탈경계적 공간 인식−손장순과 김지원의 유학·이민 서사를 중심으로>, <기억의 토포스, 존재의 아토포스−독일 토포필리아와 전혜린의 글쓰기>, <1990년대 여행 서사의 문화 지형과 젠더 감수성>, <지도 바깥의 여행, 유동하는 장소성−2000년 여행 서사의 장소 전유 방식>, <여행 서사의 재난 모티프를 통해 본 포스트모던 관광의 진정성 함의>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7년 ≪문학나무≫ 평론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현재 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차례
눈 오는 밤
어머니
살인(殺人)
자동차 운전수(自動車 運轉手)
마지막 편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불상한 어머니―혼인―안해, 아들 ―다 일업다. 나는 배화야겟다. 모르는 진리를 캐야겟다. 참사람이 되여 하로라도 참생활을 하다가 죽자. 사회에 가졍에 돈에 무엇무엇에 밤낫 을켜 허둥지둥할 것 업다. 나가자. 압흐로 나가자, 쳘두쳘미하게―혼인? 흥! 혼인하는 날이면 볼일 다 본다. 어린것이―”
−<눈 오는 밤>에서
나는 깨다랏슴니다. 나브터 롱촌의 사람이 되려고 햇슴니다. 그려고 나는 흙에서 살며 닑고 쓰며 수양하고 또 불상한 그들을 아는 대로 가라처 보럄니다. 이것이 장차 나에 할 일이외다. 나는 흙을 파다가 흙에 파믓처 죽으럄니다.
−<마지막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