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빈궁문학
<복선이(福善伊)>, <채색교(彩色橋)>, <적빈(赤貧)>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한다. 궁핍한 하층민의 삶을 주로 여성적 시각에서 묘사한 작품들은 조혼의 폐해나 가난으로 인해 벌어지는 남녀 간의 문제를 중심으로 현실의 비극성을 담아낸다.
<적빈>은 이러한 가난의 문제를 모성적 관점에서 매우 생생하게 형상화한다. 무능한 노름꾼인 아들을 대신하여 해산을 앞둔 며느리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매촌댁’의 모습은 ‘한국적 모성’과 더불어 강렬한 생명력을 극단적인 궁핍의 형상을 통해 그려낸다.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 똥까지 참는 매촌댁의 희극적인 모습은 빈궁한 당대 현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백신애의 소설은 이러한 가난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물의 강렬한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궁핍한 당대 현실을 극단적인 형상으로 부조해 낸다. 빈궁의 문제는 작가의 현실 인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초기 소설의 가장 중요한 테마로서, 이후 그녀의 관심은 다양한 현실의 문제로 확대된다.
현실주의 문학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와 일제 강점기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작품들로 나눌 수 있는데, 물론 이 두 개의 주제는 조선적 근대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현수(鄭賢洙)>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문제를 인간의 심성이나 존엄성과 연관하여 형상화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은 상실되지만 궁극적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가치 있는 삶도 성취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이 소설은 드러낸다. 반면 <어느 전원(田園)의 풍경(風景)>은 자본주의 사회의 법률의 허점과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인간관계를 가부장제 사회의 현실을 통해서 그려낸다. 이 소설들을 통해 그녀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문제점을 비판하고 폭로한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그려내는데도 작용한다. 중농이었던 주인공이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린 <악부자(顎富者)>는 전근대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근대적 환경에 동화되지 못하는 한 개인을 통해 근대 물질문명의 비인간성을 비판한다. 반면 <학사(學士)>는 지적 우월성과 허위의식에 빠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제 강점기 고학력 룸펜들의 문제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이 작품은 근대 교육의 수혜자들이지만 전근대적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지식인의 이율배반을 그리고 있다. 이는 서구적 생활양식을 지향하면서도 의식은 전근대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여주인공을 희화화한 <일여인(一女人)>에서도 이어진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근대적 의식 속에서 근대적 물질문명을 경험하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묘사한다. 이와는 달리 <꺼래이>나 <멀리 간 동무>, <가지 말게> 등은 가난 때문에 러시아나 만주로 이주한 일제 강점기의 피폐한 민중적 현실을 생생하게 부조해 낸다.
여성주의 문학
백신애의 등단작인 <나의 어머니>는 여성운동가인 ‘나’와 전근대적 여성인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고스란히 투영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의 지배와 억압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 근대적 사회를 건설하고 구성하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여성상을 탐색한다. 이러한 주제는 <낙오(落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봉건적 사회 구조 속에서 자아실현의 욕망을 가진 두 여인의 의식과 실천의 문제를 그린 소설은 작가를 비롯한 당대 신여성들의 내면적 갈등을 인물의 대비를 통해 형상화한다. <나의 어머니>와 <낙오>가 미혼 여성의 내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혼명(混冥)에서>와 <광인수기(狂人手記)>는 이혼 여성을 통해 가부장제 봉건사회의 억압 구조와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혼명에서>가 결혼제도에서 이탈한 여성의 소외의식과 이혼 여성에 대한 가족들의 전근대적 억압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광인수기>는 남편의 외도에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여성의 고통을 강렬한 광기의 언어로 형상화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광인수기>에서 여성 화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준 남편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전향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백신애는 <광인수기>를 통해 전향한 사회주의자의 타락을 아내의 시점을 빌려 비판한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쏟아진 전향 소설의 주제―진정한 근대적 의식과 실천에 이르지 못한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를 여성적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인의 언어를 빌려 남성적 사회의 폭력과 이중성을 통렬하게 폭로하는 이 소설은 그 언술의 강렬함으로 인해 남성 지배 사회에 대한 매우 강한 혐오와 부정의 태도를 표현한다.
한편 작가의 사후에 발표된 유고작 <아름다운 노을>은 남성 지배 사회의 구조를 남녀 간 관계의 역전을 통해 전복하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가부장제 사회의 구속과 여성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인의 욕망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장성한 아들이 있는 32세의 여성과 19세의 소년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은 근친상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면서, 남성 우위의 통상적인 이성관계를 역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여성의 갈등과 사랑은 여성의 근원적인 욕망의 발견이라는 점과 더불어 가부장제 사회구조를 전복하는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200자평
백신애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여성적 시각에서 형상화한 뛰어난 현실주의 작가다. 여성의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당대 현실에 대한 폭넓은 비판적 의식을 보여준 그녀의 소설들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있었던 1930년대 조선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부장제 사회의 구속과 억압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여성적 욕망을 새롭게 발견하는 그녀의 작품에서 우리는 한국 여성소설의 한 본령을 목도하게 된다.
지은이
백신애는 경상북도 영천군 창구동에서 아버지 백내유(白乃酉)와 어머니 이내동(李內東)의 딸로 출생했다. 다섯 살 위인 오빠(백기호)가 있었으며 아명은 무잠(武岑), 호적명은 무동(戊東)이었다. 정미소를 경영한 부친은 영천의 소문난 개명한 부자였는데, 외동딸의 교육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으며 완고했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여 이모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11세에 영천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으나 다음 해 중퇴하여 대구신명학교로 전학했다. 15세에는 백술동(白戌東)이란 이름으로 영천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같은 해 4월 경북공립사범학교(대구사범) 강습과에 입학했다. 17세 되던 1924년에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영천공립보통학교에 이어 경산자인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 여성동우회·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이유로 강제 사임했다. 상경 후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1927년 러시아를 둘러보고 두만강 국경에서 왜경에 잡혀 심하게 고문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입원하여 다음 해 퇴원한 뒤에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응모한 <나의 어머니>가 소설부 1등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듬해에 도일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적을 두었고 1931년에 귀국했으나 부모의 결혼 강요에 못 이겨 다시 도일하였다가 이듬해 가을 귀국하여 오사카상고 출신의 은행원 이근채(李根采)와 약혼했고 1933년(26세) 봄에 결혼했다.
1933년경부터 창작에 전념하여 미완성 장편(<의혹(疑惑)의 흑모(黑眸)>) 1편, 중편 2편(<정조원(貞操怨)>, <아름다운 노을>)을 포함하여 스무 편에 가까운 소설과 30여 편의 수필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 <꺼래이>, <채색교>, <적빈>, <낙오>(1934년), <악부자>, <정현수>(1935년), <학사>(1936년), <소독부(小毒婦)>, <일여인>(1938년), <혼명에서>, <아름다운 노을>(유작, 1939년) 등이 있다.
1938년 남편 이근채와 별거하고, 같은 해 가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40여 일간 체류하던 중 집사를 시켜 이혼 수속을 밟게 하였다. 이듬해 5월 위장병으로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같은 해 6월 23일에 사망했다. 장지는 경북 칠곡 동명에 있다.
옮긴이
김문주는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95년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조지훈 시에 나타난 생명의식 연구>로 석사학위를, <한국현대시의 풍경과 전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200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제9회 ‘젊은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지은 책으로는 ≪형상과 전통≫, ≪소통과 미래≫ 등이 있다. 고려대학교, 서울산업대학교, 안양대학교 등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BK사업단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차례
나의 어머니
꺼래이
적빈(赤貧)
광인수기(狂人手記)
아름다운 노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 어머니! 가엽슨 어머니! 지금 어머니는 내가 안타가운 어머니의 속을 알지 못하고 야속한 어머니로만 역이는 줄 아시고 그다지 괴로워하심니?. 이 몸을 어머니가 말슴하신 그 김(金)가에게 밧치어 깃버하는 어머니의 얼골을 잠시라도 보고 십흘 만치 이 딸의 가슴은 죄송함에 떨고 잇습니다. 엇더케 하면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마음 편케 모실 수가 잇슬까요! 내가 사랑하는 장내 나의 남편이 되기를 어머니 몰으게 허락한 ××? 그도 나와 가튼 우름을 우는 불행과 저주에 헤매는 가난한 신세이외다. 그러면 나는 무엇으로 어머니를 편케 할가요! 그러나 아! 그러나 나의 어머니여 나는 어머니가 조화하시는 김가에게도 이 몸을 밧치지 안흘 것임니다. 또 래일 밤도 빠지지 안코 가야 합니다.
가엽슨 나의 어머니여.’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