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수주 변영로는 대표작 <논개>와 함께 ‘민족정신’을 노래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 실린 <논개>가 변영로를 ‘민족의 시인’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그가 식민지 시기에 보여 준 굽히지 않는 정신 또한 그의 시를 ‘민족정신’의 발현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변영로의 시를 ‘민족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는 관행은 오히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수다한 장점들을 가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실제로 시집 발간을 전후로 1960년대까지 변영로 시의 특징으로 종종 언급되었던 ‘언어’와 ‘기교’는 이후의 연구가 ‘민족정신’이라는 ‘관념’에 집중됨에 따라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관념’(임)에 대한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언어’와 ‘기교’에 의해 드러나는 ‘현상’의 감각적 형상화라는 측면이 소홀히 다뤄진 것이다. 변영로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집단적 요구’와 ‘근대시’와 ‘근대 주체’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개별적 요구’가 충돌하면서도 맞물렸던 1920년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변영로의 시 세계를 ‘민족정신’이라는 집단적 가치의 형상화로 규정할 때, 그의 시에 나타나는 근대성의 편린들을 밝히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 글은 ‘민족정신’과 함께 변영로의 시에 나타난 자연과 심리 ‘현상’의 감각적 형상화 양상을 밝힘으로써 1920년대 시사(詩史)에서 그의 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감각’이 ‘민족정신’이라는 ‘관념’은 물론 자연 및 심리 ‘현상’을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매개’ 역할을 했음을 작품 분석을 통해 규명하고 변영로 시의 주체가 ‘감각’을 통해 ‘식민지 근대’라는 모순의 시대를 돌파해 나갔음을 밝힐 것이다. “슬픔과 비애 그리고 허무적 감정이 주조”를 이루었던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을 고려한다면 ‘관념’과 ‘현상’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시들이 당대의 시인들로부터 변영로를 변별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변영로는 ‘임’이라는 부재의 대상을 절대적인 ‘관념’으로 형상함으로써 피식민지인으로서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상’을 감각적 체험의 구체성을 통해 형상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미적 실천을 수행했다. 따라서 변영로 시의 주체는 역사적 주체와 미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을 동시에 수행한 근대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임)과 함께 ‘현상’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1920년대 시단에서 차지하는 변영로 시의 위치는 분명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200자평
1924년, ≪조선의 마음≫은 발행되자마자 판매 금지, 압수된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조선 마음’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비운의 미녀 논개는 고결한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거듭났고 수주 변영로는 문단에 길이 남을 민족 시인이 되었다.
지은이
수주(樹州)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 서울에서 아버지 변정상과 어머니 강재경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해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21년 ≪신천지≫ 1호에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1922년 ≪신생활≫ 4월호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했다. 1948년 서울시문화상 문학 부문을 수상했으며 195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에 취임했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했다.
생전에 ≪조선의 마음≫(평문관, 1924)과 ≪수주시문선≫(경문사, 1959)을, 영문 시집으로 ≪Grove of Azalea≫(1948)와 ≪Korean Odyssey≫(국제출판사, 1955)를 출간했다. 그 밖에 ≪조선시인선집≫(조태연 편, 조선통신중학관, 1926), ≪조선명작선≫(김동환 편, 삼중당서점, 1943), ≪한국시인전집≫ 제1권(유정·이봉래 편, 학우사, 1955)에 작품이 실렸다. 20주기를 맞아 ≪수주 변영로문선집≫(한진출판사, 1981)이, 그 후로 ≪변영로전작시집-차라리 달 없는 밤이드면≫(김영민 편, 정음사, 1983), ≪교열본 수주 변영로 시전집≫(김영민 편, 한국문화사, 1989), ≪수주 변영로 시전집≫(민충환 엮음,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10), ≪변영로 연구≫(구자룡 엮음, 산과들, 2012) 등이 간행되었다. 수필집으로는 ≪명정40년≫(서울신문사, 1953), ≪수주 수상록≫(서울신문사, 1954) 등이 있다. 1999년부터는 부천시에서 수주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수주문학상’을 제정해 시행했으며 올해로 14회를 맞이했다. 또한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2008년부터 수주문학제 운영위원회)는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수주 변영로 문학제’를 개최했다.
엮은이
오세인은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근대시에 나타난 도시 인식과 감각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겨울 ≪서정시학≫으로 등단해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후 연수를 받고 있다.
2000년 6월부터 약 6년간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 한국어문화교육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 그리고 문학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각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었다. 2005년 8월부터 6개월간 미국 UCLA 한국학센터(Center for Korean Studies)에 방문 학자(Visiting Scholar)로 머물며 해외에서의 한국학, 특히 한국 문학 교육과 연구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원대학교, 배재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한림대학교, 고려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2008년부터 순천향대학교 국제교육교류본부 아시아학 과정에서 교환 학생들에게 한국 문학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차례
≪조선의 마음≫
서 대신에
버러지도 실타 하올 이 몸이
생시에 못 뵈올 님을
벗들이여
날이 새입니다
그때가 언제나 옵니까?
봄비
눈[眼]
님아
사랑은
오, 솟는 해
論介
님이시어
氣分轉換
放浪의 노래
雪上逍遙
친애하는 벗이여
낫에 오시기 꺼리시면
가을 하늘 미테서
하늘만 보아라
오, 나의 靈魂의 旗여!
追憶만이
二月 햇ㅅ발
못 노이는 마음
오 날개여
봄날에
차라리 달 업는 밤이드면
오 날개여
돌 속에도
≪조선의 마음≫ 이후
夏日情趣
엇던 날
달밤
失題
그림 그리는 가을
昆蟲九題
개고리
땅거미 긜 때
四壁頌
“유線”과 “義의 線”
山羊
待君哀
돐은 되었것만
조이는 마음
홀로 뜬 별
긴 강물이 부러워
現代의 “라오쿠−ㄴ”
흔들리는 적은 배
微想
간 안해에게
遊離
○○에게(其一)
○○에게(其二)
열 번째의 八·一五
夢美人
近吟 三首
저녁놀 빗
잠 놓진 밤
履聲滿街
六花六稜
故鄕
鋪道를 걸으며
自己의 그림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서 대신에
‘조선 마음’을 어대 가 차즐가?
‘조선 마음’을 어대 가 차즐가?
굴속을 엿볼가, 바다 밋을 뒤저 볼가?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헷처 볼가?
아득한 하눌가나 바라다볼가?
아, ‘조선 마음’을 어대 가서 차저볼가?
‘조선 마음’은 지향할 수 업는 마음, 설흔 마음!
●그때가 언제나 옵니까?
그대와 내 사이에
모든 가리움 업서지고,
넓은 해빗 가운대
옷으로 염(斂)하지 안이한
밝아벗은 맨몸뚱이로
얼굴과 얼굴을 對할
그때가 언제나 옵니까?
‘사랑’과 ‘미듬’의 하얀 불꼿이
‘말[言語]의 낡은 집’을 사루어,
그대와 내 사이에
말업시 서로 알아듯고,
채침 업시 서로 붓좃고,
淫慾 업시 서로 끼어안을
그때가 언제나 옵니까?
오, 그대! 나의 靈魂의 벗인 그대!
우리가 그리우는 ‘그때’가 오면은,
‘우리 世紀의 아츰’이 오면은
그때는 우리 둘이
부끄러워서 눈을 피하지 안흘 터이지요.
두려워서 몸을 움치러들이지 안켓지요
오, 그대! 언제나 그때가 옵니까?
●돐은 되었것만
어느덧 돐은 되었것만
이 아기 가여운 요 아기
걷기는커냥 기지도 못하네
기기는커냥 서지도 못하고
서기는커냥 앉지도 못하며
앉기는커냥 엎치지도 못하네
무삼 아기 이리도 늦되는가
아비 탓일까? 어미 까닭일까?
이도 그도 저도 아니라면
애받이[産婆] 서툴러서일까?
가난한 집에 기구 있을 리 없것만
부르지 않은 애받이 둘이나 되어!
서로 받고 서로 씻기며
한 胎를 둘이 갈르는 서슬
어느 틈 어느 겨를 어느 사이엔지
아기 모양 야릇케도 된데다가
서고 기고 앉고 엎치기는새레
눈도 못 뜨고 귀조차 트이지 않었네
어느덧 돐은 되었것만!
1946. 8. 15
●간 안해에게
(一)
기나긴 二十여년 하로가티 살어오다
가는곳 다르냥 허황이도 난호이니
생신채 꿈만가타야 어리둥절 합니다
(二)
지난날 도라보니 뉘우침이 반넘안데
슬픔은 일다가도 춤해질때 잇것마는
뉘침은 고집스레도 처질줄만 압니다
(三)
철모른 어려부터 맛나지내 그랫든지
남다른 그무엇을 감감히도 모를르니
오날엔 이어인일로 이대도록 슬플가
(四)
연락도 없는일이 가진추억 자어내어
되붓는 불가티도 와락이는 그슬픔야
쇠아닌 마음이어니 아니녹고 어이리
(五)
몸구지 가려거든 기억마저 실어가오
액구진 몸만은 뿌리치듯 가면서도
무삼일 저진옷같이 기억만은 감기노
(六)
뭇소리 가운대에 괴괴함이 떨어지어
귀만은 식그러나 마음홀로 호젓코나
눈감고 잇든날음성 드러볼가 합니다
(七)
고요한 불빛이나 감은눈엔 흔들린다
꿈도 아니지만 생시또한 채는아닌
흐미한 그길이나마 거러보면 어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