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빈디체는 정혼자가 공작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가 공작의 세도에 못 이겨 병환으로 죽은 뒤, 스페인어로 ‘복수하는 사람’을 뜻하는 이름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 된다. 죽은 정혼자의 해골을 손에 들고 등장한 빈디체의 독백은 이후 전개될 무시무시한 복수 과정을 예고한다. 한편 공작과 공작의 아들, 새로운 공작부인과 그녀의 세 아들, 공작의 사생아까지, 권세를 등에 업은 이들의 악행은 거침이 없다. 정숙한 부인을 겁탈하고 순결한 처녀를 욕보이고 권력을 위해 간계와 살인도 서슴지 않지만, 법은 이들을 심판하지 못한다. 빈디체는 스스로 악이 되어 공작 부자를 충동질하고 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도록 교묘히 계략을 세운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를 완수한다.
<복수자의 비극>은 여러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닮았다. 복수를 위해 연극을 이용하는 것이며 복수를 완수한 뒤 복수자도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결말, 복수자가 손에 해골을 들고 독백하는 세부 장면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두 작품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복수 이후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햄릿의 죽음 이후 덴마크 왕국은 혼란을 수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복수자의 비극>에선 악의 축이었던 공작 가문이 멸문되다시피 한 뒤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오 역시 폭력과 억압으로 공국을 다스릴 조짐을 보인다. 빈디체는 피의 시대를 끝내고자 죄를 자백하며 법에 심판을 맡겼지만, 새로운 통치자 안토니오는 빈디체가 쏘아 올린 반란의 화살이 다시 자신에게로 향할까 두려워 성급히 빈디체를 처형해 버린다. 미래에 대한 낙관과 비관이라는 관점의 차이는 두 작품이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름을 보이는 결정적인 요소다.
토머스 미들턴은 <복수자의 비극>으로 복수극의 전형을 완성했다. 불륜, 살인, 욕정으로 혼탁해진 영국 귀족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곳곳에 풍자 섞인 대사와 장면들을 배치해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복수 끝에 도래할 세계가 전보다 새롭지도, 낫지도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결말은 ‘복수자의 비극’이 단순히 죽음만은 아님을 의미한다. 희망을 꿈꾼 복수자에게는 희망이 없는 미래야말로 진정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200자평
빈디체는 공작 때문에 정혼자와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 악인이 되어 공작 가문을 파멸로 이끈다. 스페인어로 ‘빈디체(vindice)’는 ‘복수하는 사람’, ‘앙갚음하는 사람’을 뜻한다. 미들턴은 이름 뜻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가는 빈디체를 통해 당대 영국 귀족 사회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지은이
토머스 미들턴(Thomas Middleton, 1580∼1627)은 1580년 4월 18일 런던에서 출생했다. 미들턴은 당시의 소년들처럼 문법학교에서 라틴어를 비롯해 인문학을 공부하고 18세가 되던 1598년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 입학해 고전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미들턴은 대학을 중퇴한 후 런던으로 돌아와 견습 작가로 극작을 시작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토머스 데커를 비롯한 선배 작가들과 같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초기 토머스 데커와 공동 작업한 <인내심 많은 남자와 순결한 창녀>와 <왈가닥 여자>를 비롯해 윌리엄 로울리와 공동 작업한 <체인즐링>, 단독으로 쓴 <칩사이드의 순결한 처녀>, <여자여, 여자를 조심하라>, <인내심 체스 게임> 등이 있다.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미들턴은 1620년 런던 시의 역사가로도 임명된다. 가장 유명하다.
옮긴이
오수진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원대학교 영어교육과 조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햄릿>에 나타난 이야기하는 그림>,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 : 에크프라시스>, <<리어왕>에 나타난 재현 방식의 파라고네와 상호작용>, <셰익스피어의 설화시 <루크리스의 능욕>에 나타난 에크프라시스>, <<리처드 3세>에 나타난 고딕적 특성> 등이 있다. 그 외 번역서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1부≫, ≪헨리 6세 2부≫, ≪한여름 밤의 꿈≫, ≪오셀로≫가 있으며, 현재 <폭풍우>를 번역하고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1막
2막
3막
4막
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빈디체 : 통치권을 가진 호색한, 공작은 가라.
백발의 간통을 저지른 자,
공작만큼 뼛속까지 불경한 그자의 아들인 너도,
사악함 속에서 태어난 공작의 사생아인 너도,
또한 악마와도 동침하려 들 공작부인 당신도 가라.
훌륭한 넷이로다. 오, 노년의 나이가 골수 없는
저자의 텅 빈 뼈에 저주받은 욕망을 채워
바싹 말라 버려 물기 하나 없는 호색한인
메마른 공작의 방탕한 혈관 속에
열기 대신 지옥 불을 붙여 주길.
-7쪽
공작 : 악당, 그게 너였나?
그렇다면.
빈디체 : 그래 나다. 빈디체, 바로 나야.
히폴리토 : 네놈한테 이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
우리 아버님께서는 네놈의 냉대에 감염되어
병이 드셨고, 슬퍼하다 돌아가셨다.
그걸로 네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 봐라.
공작 : 오!
빈디체 : 아버님은 혀를 쓸 수 있었지만 슬픔에 빠져
아무 말씀도 안 하고 돌아가셨다.
쳇, 이건 거의 시작일 뿐이야.
이제 네 영혼에 궤양이 달라붙게 하고
슬픔으로 네 정신이 아주 쓰라리게 만들어 줄 테니
그 고통은 가만히 있지 않고
전염병 걸린 사람처럼 네놈 가슴을 마구 찔러 댈 거야.
공작, 내 말 잘 들어.
네놈은 명성이 자자한 지체 높고 대단한
오쟁이 진 남자가 됐어.
공작 : 오!
-133쪽
빈디체 : 어째서? 우리를요?
안토니오 : 저자들을 끌고 가서 신속히 처형하라.
빈디체 : 아니. 폐하, 그건 폐하께 좋은 일 아닌가요?
안토니오 : 나한테 좋은 일이라고?
저자들을 끌고 가라! 나도 공작님처럼 늙었으니
네놈들이 그분을 살해했듯 나도 죽이겠지.
빈디체 : 이렇게 되는 거였어?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