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디드로의 철학 콩트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프랑스인으로는 처음 세계일주를 하고 1771년 여행기를 출판한다. 드니 디드로는 부갱빌의 여행기에서 영감을 얻어 익명의 대화자가 나누는 대담 형식의 철학 콩트를 완성한다. 대화자 A.와 B.는 부갱빌의 여행기에 덧붙인 글(보유)을 장황하게 인용하여 도덕의 근원과 보편성에 대해 논한다. 논쟁의 소재가 되는 ‘부갱빌 여행기에 덧붙인 글’은 디드로의 창안으로, 실제 여행기에 대한 가상의 속편, 이를 두고 논쟁하는 가상의 대담이라는 다소 복잡한 구성은 당시 철학 콩트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로써 디드로는 ≪이것은 콩트가 아니다≫와 ≪카를리에르 부인≫을 잇는 디드로의 철학 콩트 3부작을 완성했다.
부갱빌 여행기에 덧붙이는 글
대화자 A.와 B.는 ≪부갱빌 여행기 보유≫ 가운데 ‘노인의 고별사’와 ‘사제와 오루의 대담’이라는 두 개 대목을 인용한다. ‘노인의 고별사’에는 타히티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에게 미친 악영향에 대해 탄식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환대에 보답은커녕, 질투와 경쟁심을 심어 주고 그들에게서 자유와 재산을 빼앗은 침략자들로 묘사된다. 실제 부갱빌의 여행기에는 나오지 않는 대목이지만 디드로는 부갱빌이 유럽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 대목을 뺐다고 가장하며 가상의 고별사를 실제인 것처럼 꾸민다. ‘사제와 오루의 대담’을 통해서는 타히티의 풍속이 소개된다. 글에 나타난 타히티의 풍속, 도덕관은 유럽 기독교 세계관에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담에서 사제는 타히티 부족장 오루의 논리정연한 주장에 굴복하며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종교관과 세계관을 내려놓고 타히티의 풍속을 받아들인다. 역시 부갱빌의 여행기에는 나오지 않는 이 대목에 대해 디드로는 검열 탓으로 돌리며 사제와 오루의 가상의 대담 역시 사실인 것처럼 꾸며 놓았다.
디드로의 유토피아
디드로는 부갱빌의 여행기에 나타난 타히티 섬의 풍속과 세계관에서 그동안 자신이 상상해 왔던 유토피아를 발견했다. 자연의 이치와 요구에 부응하며 살아가는 타히티 원주민들의 삶의 태도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부여된 질서와 강제가 인간 본성을 어떻게 짓눌러 왔는지를 보여 준다. 문명사회의 도덕관, 종교관, 국가관에 정면 도전하는 이 글에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가이자 백과전서파의 수장 드니 디드로의 사상과 이상이 압축되어 있다.
200자평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백과전서파의 수장인 드니 디드로의 사상과 이상이 압축되어 있는 철학 콩트다. 디드로는 부갱빌의 세계 여행기를 토대로 가상의 ‘보유’를 상정하고 익명의 대화자들이 이를 두고 논쟁하게 함으로써 문명인의 종교관, 도덕관, 국가관과 타히티 부족민의 자연에 합일된 삶을 대비시키며 문명사회를 비판한다.
지은이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 랑그르와 파리의 예수회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쳤고 1732년 파리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로 ≪백과전서≫를 주도적으로 집필, 편찬했다. 이외에 희곡 ≪사생아≫, ≪가장≫ 등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예술 비평 ≪살롱≫을 집필했다.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로 옮겨가 1759년 무렵에 ≪수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담 형식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 ≪라모의 조카≫ 등을 발표한다. 프랑스 내에서는 검열 등으로 출판이 제한당하는 등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원을 받으며 저술을 지속했다. 디드로는 자신의 저서와 수사본 전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왕립 도서관에 판매했다. 말년에는 파리 근교 세브르에서 지내며 집필을 계속했고 파리 리슐리외 거리에 있는 브종 저택으로 이한 뒤 얼마 후 사망한다. 사망 후 그의 도서는 전부 예카테리나 2세에게 헌납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단되었다.
옮긴이
정상현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아미앵의 피카르디 대학교에서 <디드로의 윤리관: 절충주의와 대화주의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디드로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으며, ≪입싼 보석들(Les Bijoux indiscrets)≫(2007)과 ≪부갱빌 여행기 보유(Le 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e)≫(2003)를 번역했다. 퀘벡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와 미학을 연구 중이며, 그 결과물로 ≪퀘벡 소설의 이해≫(2007)를 출판했고, 퀘벡의 국민 작가인 안 에베르(Anne Hébert)와 ‘조용한 혁명기’ 작가인 제라르 베세트(Gérard Bessette)와 레장 뒤샤름(Réjean Ducharme) 등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준비 중이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프랑스언어 · 문화학과 교수다.
차례
I. 부갱빌 여행기에 대한 판단
II. 노인의 작별 인사
III. 부속사제와 오루의 대화
IV. 부속사제와 타히티 주민과의 대화의 계속
V. A.와 B.의 대화의 계속
해설
드니 디드로 연보
참고문헌
미주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도대체 자네는 타히티 사람은 자유를 지킬 줄도 모르고 죽을 줄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짐승에게 하듯 점령하려고 하는 타히티인은 자네의 형제야. 여러분은 자연의 두 자손이란 말일세. 타히티인은 자네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데, 자네는 무슨 권리로 그를 마음대로 한다는 거지? 자네가 왔어. 우리가 자네 몸에 덤벼들기라도 했나? 자네 배를 약탈이라도 했단 말인가? 자네를 잡아서 우리 적들의 화살받이라도 시켰단 말인가? 우리의 가축들이 하는 밭일을 자네가 거들도록 시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는 자네 모습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존중했어. 우리의 풍속을 그냥 내버려 둬. 자네들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정직하단 말이야. 자네가 우리의 무지라고 부르는 것과 자네의 쓸데없는 지식들을 교환할 생각이 전혀 없네.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용(有用)한 것은 모두 다 가지고 있으니까.
-22쪽
부속사제. 자네 오두막과 이 오두막에 갖추어져 있는 가재도구들은 누가 만들었지?
오루. 내가.
부속사제. 아, 그래! 우리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은 한 직공(職工)이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네.
오루. 그럼 그는 두 손, 두 발, 머리를 갖고 있겠네?
부속사제. 그렇지 않아.
오루. 그는 어디다 거처를 만들어 놓았지?
부속사제. 어디에나 다.
오루. 이곳에도?
부속사제. 여기에도.
오루.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부속사제. 그분은 보이지 않아.
오루. 아, 정말 냉담한 아버지로군. 틀림없이 나이도 꽤 들었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당신이 만든 것만큼의 나이는 되셨을 테니까.
부속사제. 그분은 나이를 전혀 드시지 않아. 그분은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 그들에게 율법을 내리셨어. 당신이 공경을 높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그들에게 지시하셨지. 어떤 행위들은 선한 것이라 하여 그들에게 명하셨고, 그 외 다른 것들은 악행이라 하여 금하셨지.
오루. 알겠네. 그분이 악행이라 하여 금했던 행위들 중 하나가 부인이나 처녀와 자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왜 그분은 성을 둘로 나누었지?
– 41쪽
이 계율들이 왜 자연에 위배되는가 하면, 느끼고, 생각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자기와 같은 존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전제하니까 그렇단 거라네. 이러한 권리는 무엇에 근거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나라에서는, 감수성도 생각도 욕망도 의지도 없고, 내버려도 손에 쥐어도 곁에 두어도 바꾸어도 고통을 입지도 불평을 하지도 않는 것과, 절대 바꿔서도 소유해서도 안 되고, 자유와 의지와 욕망이 있으며, 한동안 자신의 몸을 내맡기거나 혹은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영원히 자신의 몸을 내맡기거나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불평을 하고 고통을 입기도 하며, 그 특성을 망각하지 않고 본성을 침해하지 않고서는 상거래의 결과가 될 수 없는 것들을 혼동해 왔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존재의 보편적 법칙에 위반되는 거지. 우리한테 있는 변덕을 금하고, 우리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절개를 명하며, 자연을 위배하고 암컷과 수컷을 영원히 서로에게 예속시켜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계율이나, 향락 중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성적 쾌락을 한 개인에게만 묶어 두는 정절이나, 육체를 가진 두 존재가 한 순간도 같은 상태에 있지 않은 하늘 아래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동굴 안이나, 산산조각이 나 떨어지는 바위 아래나, 금이 가 쪼개진 나무 밑이나, 흔들거리는 바위 위에서 하는 불변의 맹세보다 더 몰상식한 것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 분명히 말해 두겠네만, 당신네들은 인간의 조건을 동물의 조건보다 더 나쁘게 만들어 놓았어.
–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