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브레히트, 현대 연극의 과제에 답하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을 시작한 1930년대, 브레히트는 망명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독자적인 연극 이론 개발에 매진했다. 나치즘이 확산하던 어두운 현실에서 브레히트는 현대의 연극이 궁극적으로 현실 개선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극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고 일상에서 감지되지 않는 복잡한 사회적 역학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20세기 연극 예술의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관객이 현실 개선을 위해 행동하게 할 수 있을까? 기존의 연극 형태로는 브레히트가 생각하는 이러한 연극적 과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20세기의 급변하는 사회를 반영할 수 있고, 현실 개선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연극이 필요했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서사극 이론, 현대 연극사상 가장 혁신적인 연극 이론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카타르시스 비판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은 관객을 허구의 극적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관객은 극적 상황에 몰입하고 극 중 인물에게 동화하면서 공포와 연민을 느끼고 카타르시스에 이른다. 유럽 연극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주의 연극도 그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을 통해 자연주의 연극과는 다른 길을 향한다. 그는 관객의 무비판적인 감정 이입을 오히려 견제하며, 관객에게 공포와 연민 대신 오락과 교훈을 주고자 한다. 문제는 관객의 태도다. 이전까지 관객에게 연극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란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무대 위 허구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관객이 연극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직시하길 바랐다. 그러자면 관객이 극적인 세계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게 할 장치가 필요했다. 관객을 깨어 있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 서사극은 이런 새로운 연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
생소화 기법, 새로운 연기법의 모색
그러나 극 형식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형식의 연극도 여전히 관객을 허구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관객이 무대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데서 벗어나 현실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게 하려면, 무엇보다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현실의 부조리를 관객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해야 했다. 브레히트는 그 방법으로 생소화 기법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연기법을 제시한다. ‘생소화 효과’란 관객이 잘 알고 있던 것, 익숙한 것을 특별히 눈에 띄는 것, 예기치 못했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배우는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요구에 직면한다. 등장인물의 심리에 전적으로 이입하지 말 것, 무대 위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인물을 관객에게 보여 줄 것 등이다. 브레히트는 배우가 자기가 맡은 인물을 주체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길 원했다.
브레히트가 전하는 연극을 위한 지침
이 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글들을 모으고 정리해 하나의 연극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브레히트는 현대 연극의 과제와 목적을 새롭게 설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모든 방법을 모색했다. 예술과 배움의 결합, 종래 연극과 새로운 연극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브레히트는 궁극적으로 연극을 통한 현실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이 예술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브레히트의 근본적인 관심은 정치가 아니라 연극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하는 브레히트의 연극을 위한 지침이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연극인들에게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200자평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현대 연극의 가장 획기적인 혁신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생각을 종합하고 체계화해 하나의 ‘연극 이론’으로 꿰어 저술한 적이 없기에 ‘현대 연극사상 가장 획기적인 혁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브레히트가 여기저기에 기고했던 ‘연극에 관한 글들’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히트는 연극에 관한 일련의 글을 통해 극적 환상을 배제한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이론을 확립하고 이를 서사극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서사극을 위한 새로운 연기법, 무대와 음악을 함께 제시했다. “우리 시대의 연극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브레히트의 답이었다. 브레히트의 독자적인 연극 이론과 실천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책은 브레히트가 남긴 글들 가운데 연극에 관한 것, 특히 그의 서사극 이론을 이해하는 데 지침이 되는 내용만을 뽑아서 체계화한 것이다.
지은이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거쳐 1908년 아우크스부르크 김나지움에 입학한 그는 이미 15세 때부터 시 작업을 시작해 학생 잡지 ≪추수≫를 발행하는 등 친구들과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고 이 활동을 통해 그의 문체는 도발적이 된다. 이때 같이 활동하던 판첼트, 카스파르 네어, 뮌스테러 등과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카스파르 네어는 망명에서 귀국한 브레히트의 무대를 만들었다. 1928년에는 <서푼짜리 오페라>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나치 집권기인 1933년 2월 28일 망명길에 오른 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미국을 전전하면서 15년간 독일 외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동베를린으로 귀환한 뒤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1949)을 공연하여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부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여 연극 작업에 몰두하다가 1956년 8월 1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김기선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 대학교 철학부 독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한국학과 전임 강사, 성신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동 대학교 명예 교수다. 번역한 책으로 ≪서사극 이론≫, ≪메피스토≫,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아르투로 우이의 집권≫, ≪사춘기≫, ≪속바지≫, ≪스놉≫, ≪깨어진 항아리≫, ≪탈리스만≫ ≪카이트 백작≫, ≪윤무≫, ≪민나 폰 바른헬름≫, ≪세계 제2차 대전 중의 슈베이크≫, ≪거짓말하는 자 벌받을지어다≫, ≪아름다운 낯선 여인≫ 등이 있다. ≪20세기 초 독일 연극과 동양≫(독), ≪한국의 독일 문학 수용 100년≫ 중 희곡 수용에 관한 글들, 독일 연극의 동양 수용, 한국의 독일 문학 수용, 독일 드라마, 독일 희곡 작품 해석, 독일 여성 문학, 독일 신화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I.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이론(1933∼1941)
1. 히틀러 이전의 독일 연극
독일의 혁명적 연극 이론
〔1920년대의 독일 연극〕
2. 감정 이입 비판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비판〕
이성적 입장과 감정적 입장
연극 예술에서 감정 이입의 과제에 관한 명제들
연극 이론에서 실용적이라고 판단되는 상황들
아리스토텔레스 희곡 이론의 직접적인 효과
사실주의 연극과 극적 환상
3. 서사극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주는 예술
오락극 혹은 학습극
서사극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흔하고도 진부한 오류의 짤막한 리스트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이론의 인과성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이론의 한계
실험극
II. 서사극(1935∼1941)
1. 새로운 연기법−생소화(1935∼1941)
생소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연기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
생소화의 정치적 이론
변증법과 생소화
생소화 효과
옛 연극의 생소화 효과
생소화 효과 내기
서사극, 소외
비판적인 태도는 비예술적인 태도인가?
2. 배우
〔연기 예술〕
역할 연구
인물의 구성
관객을 대하는 배우의 태도
〔게스투스(Gestus)〕
배우 지도
연습 지도자의 자세(귀납적 작업 방식의 경우)
신체 훈련
〔중국인의 연극〕
아마추어 연극은 논의의 가치가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배우에 대한 몇 가지 견해
3. 서사극의 무대 제작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 이론의 무대 제작
왜 무대 설비는 끊임없이 바뀌어야 하는가?
극적 환상을 배제한 현실의 재현
앙상한 무대
최소한의 것으로 충분하다
공개적으로 보여 주기
보이는 조명 기구의 광원(光源)
연습하는 과정에 무대 제작하기
무대의 문자화
4. 서사극의 음악
서사극에 사용하는 음악
게스투스 음악
무대 음악
III. 놋쇠 구입(1937∼1951)
놋쇠 구입
<놋쇠 구입>의 등장인물
1. 첫째 날 밤
자연주의
감정 이입
〔무지(無智)에 대해〕
철학자가 연극에 대해 갖는 관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철학자의 설명
2. 둘째 날 밤
시국에 관한 연설
K 타입과 P 타입
거리 장면
파시즘의 과장된 연극적 거동
작은 나치를 연기하는 배우의 변(辯)
학문
환상과 감정 이입의 제거
〔셰익스피어 극〕
피스카토르 극장
3. 셋째 날 밤
〔극 쓰는 사람의 연극〕
헬레네 바이겔의 명예로의 몰락
생소화 효과(V-Effekt)
중국 연극 예술의 생소화 효과
4. 넷째 날 밤
무대 제작자 카스파르 네어의 무대에 대한 극 쓰는 사람의 변(辯)
〔배역에 대한〕 드라마투르크의 변(辯)
즐거운 비판
예술의 정의
정치가의 강당
<놋쇠 구입> 후기
<놋쇠 구입> 이론 후기 I
<놋쇠 구입> 이론 후기 II
<놋쇠 구입> 이론 후기 III
<놋쇠 구입> 이론 후기 IV
IV.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1948)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후기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옹호
V. 스타니슬랍스키 연구(1951∼1954)
〔인물의 전개〕
〔신체 동작〕
〔운문 말하기〕
진실
‘성격’
정신 집중 방법
감정 이입
스타니슬랍스키 학회에 부치는 제안
스타니슬랍스키 연극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
VI. 연극에서의 변증법(1951∼1956)
연극에서의 변증법
(1)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 제1장면 연구
(2) 비교적 성급하게
(3) 우회(迂廻) <코카서스의 백묵원>
(4) 변증법을 응용한 다른 경우
(5) <겨울 전투>의 젊은 회르더 역을 맡은 배우에게 부치는 편지
(6) <억척 어멈>의 이중적 서술 방법
(7) 실수의 인지를 통해 착안한 장면의 예(例)
(8) 성격 묘사에 대한 소견
(9) 억지 감정 이입에 관한 대화
연극에서의 변증법에 관한 메모
〔서사극과 변증법적 연극〕
진실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갈등
극장을 감정의 학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인물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그 인물이 되는 것보다 낫다
오늘날의 세계는 연극을 통해 묘사될 수 있는가?
〔연극이 설 땅〕
형식주의−사실주의
새로운 작품의 그릇된 묘사
연극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여러 가지 작품 구성법
마지막 몇 마디
〔연극의 과제〕
부록 :
브레히트 전집을 엮은 엘리자베트 하웁트만의 주해 모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찾아보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연극이란 즐거움을 목적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허구의 사건을 생생하게 모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과거의 연극이건 새로운 연극이건 연극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다.
-465쪽
자고로 연극의 과제는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연극에 특별한 품위를 부여하는 것도 연극의 과제다. 연극은 재미 이외의 신분증은 필요 없으며 또 이 신분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필요한 것이다. 연극을 도덕의 장(場)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결코 연극의 품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연극은 오히려 품위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도덕적인 것이 즐거운 것, 다시 말해 감각적으로 즐거운 것이 되지 못할 경우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도덕적인 것이 즐거운 것이 될 경우 그 도덕적인 것은 물론 얻는 것이 있으면 있지 잃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연극은 또 관객을 가르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육체적인 면에서건 정신적인 면에서건 간에 관객을 어떻게 즐겁게 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이상의 유용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연극은 잉여의 것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나아가 사람들이 그 잉여의 것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즐거움이란 어떠한 변호도 필요 없다.
-467쪽
[연극의 과제]
이 시기의 연극은 대중에게 여흥을 제공하고 교육하며 감동을 주어야 한다. 연극은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게 현실을 보여 주는 예술 작품을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실과 인간성, 그리고 아름다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6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