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비평가>
볼로디아는 여느 때처럼 공연을 보고 돌아와 평론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그날 저녁 관객의 열띤 호응 속에 공연을 마친 극작가 스카르파다. 두 사람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볼로디아는 쓰디쓴 혹평으로 신인 작가 스카르파에게 큰 좌절을 안겨 주었다. 이제 스카르파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인정받는 대작가가 되었다. 반면 비평가 볼로디아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 10년 만에 상반된 입장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연극은 무엇인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펼친다. 토론은 마치 권투 시합 같다. 서로 맹렬한 공격을 주고받는다.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것은 스카르파였다. 스카르파가 묻는다. “연극에서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실제 삶에서도 제거해 버린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요?”
<눈송이의 유언>
바르셀로나에는 ‘눈송이’라는 이름의 흰색 고릴라가 있다. 그는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바르셀로나의 상징이다. <눈송이의 유언>은 그의 임종 순간을 그린 우화극이다. 눈송이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 앞에서 몽테뉴를 인용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는 동안 사람들이 고릴라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연기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고백은 타인을 의식해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솔하게 살라고 당부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드는 극이다.
200자평
극작가와 비평가가 연극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꼭 권투 시합 같다. 공격과 방어가 오가고 상대를 녹아웃시킬 결정적 한 방이 준비된다. 후안 마요르가의 2012년 작 <비평가> 얘기다. <눈송이의 유언>은 한때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었던 흰색 고릴라 ‘눈송이’의 임종 순간을 그린 우화극이다. 2008년 초연되었다. 함께 수록된 작가 인터뷰에서 “연극은 독자,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 온 후안 마요르가의 연극관을 확인할 수 있다.
지은이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는 1965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현재 스페인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1997년에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드리드와 근교의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마드리드 왕립드라마예술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다 현재 카를로스3세대학에서 무대예술 강좌를 총괄하고 있다. 2011년에는 ‘라 로카 데 라 카사(La Loca de la Casa)’라는 극단을 창립해 1년에 한 번 직접 연출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연극은 즐거움과 감동 외에도, 관객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사는 세상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뭔가를 던져 주어야 한다고 마요르가는 생각한다. 또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자신의 이력을 증명하듯, 극 언어가 수학처럼 정확하기를 추구하고, 진정한 연극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끼거나 회피하는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표작으로는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Cartas de amor a Stalin)>(1999), <천국으로 가는 길(Himmelweg)>(2003), <하멜린(Hamelin)>(2005), <맨 끝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2006),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8), <영원한 평화(La paz perpetua)>(2008), <갈라진 혀(La lengua en pedazos)>(2011, 작가의 첫 연출작) 등이 있다. 현재 그의 작품들은 스페인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며, 가장 많은 상을 수상했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 25개 언어로 번역되어 다양한 나라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옮긴이
김재선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스페인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La tortuga de Darwin)≫(2009), ≪영원한 평화(La paz perpetua)≫(2011), ≪하멜린(Hamelin)≫(2012), ≪천국으로 가는 길(Himmelweg)≫(2013), ≪맨 끝줄 소년(El chico de la última fila)≫(2014)을 번역했다.
차례
큰 소리로 책을 읽으시는 아버지
비평가
눈송이의 유언
지은이 인터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볼로디아: 인간에 대한 연극, 인간과 인간의 신비로움을 위한 연극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텅 빈 것과 작은 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연극은 없는 걸까요? 우리가 저항하도록 도와주는 연극 말이에요?
<비평가> 56쪽
스카르파: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경멸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요? 우리가 연극에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들을 삶에는 절대로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연극에는 요구합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그래서 오늘 밤 우리가 본 작품은 우리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비평가> 72쪽
눈송이: 여러분 모두가 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하죠. 가족들도. 자기 할아버지는 어느 요양원에 보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가족들도요. 도시 전체가 날 위해 울어 주려고 왔습니다. 도시 전체가 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게 좋은지 나한테 물어봤습니까? 소크라테스는 그 부인이 우는 것에 지쳐서 부인을 감옥에서 내보냈습니다. “나가서 울어”,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들과 철학을 나누었습니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은지 택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죽음을 준비한 몽테뉴도 그랬고요. 몽테뉴에 따르면, 울음소리에 둘러싸여 죽는 것보다 더 형편없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가 최고로 바랐던 것은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행복한 죽음은 시끌벅적하지 않게 작별하는 것이다”, 몽테뉴가 말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집에 가서 그걸 읽지 않는 겁니까? 몽테뉴를 읽고 나를 조용히 놔두세요.
<눈송이의 유언>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