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악한 소설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작가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유행한 악한 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그 도식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 방식 중 하나는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방법에서 명백히 표현된다. 고전적 악한 소설의 주인공은 흔히 출생이 불분명한 고아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귀족 아버지의 혼외자로 그려지며, 이 혼외자 출생 모티브는 악한 소설의 성격을 강화한다. 한편 평화 시기의 생활 영역에서 전승되는 스페인의 악한 소설과는 다르게, 전쟁을 경험한 작가는 자신의 ‘인생기’와 거의 일치시키면서 새로운 사건의 배경을 전쟁 영역에 두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 쿠라셰
≪사기꾼 방랑 여인 쿠라셰의 인생기≫는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의 후속편이자 안티-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가 소년 시절에 전쟁에 휘말려 광대, 군인, 방랑아, 은둔자로 살아간 순진한 남성의 모험적인 운명을 그렸다면, 이 책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운명을 그렸다. 이 여성의 운명은 여러 면에서 짐플리치시무스와는 다르게 형상화된다. 인생을 단순하게 파악하며, 첫눈에는 자연주의적이고 저속하며, 외설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분명하게 도덕적 견해를 고수하기도 한다.
새로운 여성상
작가 그리멜스하우젠은 책 전체에서 전쟁으로 각인된 한 여성, 인생의 종착역에 서서 환상을 깨뜨리며 터놓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여성의 어조를 유지한다. 이 방랑 여인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고, 자기 치부를 폭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폭행을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전쟁에 끌려 들어가 거의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거듭 남편을 잃으면서도 모든 수단을 사용해 자기주장을 하고 좌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았다. 지극히 위험한 곳을 떠돌아다녔지만 그녀의 삶은 유쾌하고 쾌락적이었으며, 항상 자신의 결정에 따른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주인공 쿠라셰는 17세기에 이미 여성 차별에 대항하며 투쟁한 현대적인 여성상을 보여 준다. 그녀는 비록 귀족 신분에서 집시 여인으로 추락했지만, 자신의 운명과 선택을 한탄하지 않고 인생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결산한다. 그리고 바로 이 여인은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에, 귄터 그라스의 소설 ≪텔크테에서의 만남≫에 형상화될 정도로 독일 문학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 이 책은 클라우스 하버캄(Klaus Haberkamm)과 귄터 바이트(Günther Weydt)가 편집한 ≪Lebensbeschreibung der Erzbetrügerin und Landstörzerin Courasche≫(Philipp Reclam jun. Stuttgart 2010)를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습니다.
200자평
사실주의적 역사소설의 시초,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의 후속편
17세기 독일의 그리멜스하우젠이 쓴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는 유럽문학에서 ≪돈키호테≫와 동급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사실주의적 유머 소설을 연 작품이다. 출생이 의심스러운 방랑하는 건달 소년에 대한 위선 없는 악한 소설이면서도, 황당무계하면서도 유의미한 내용이 담겨 있어 “지독히 웃기며, 남자답고 유용하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알려져 당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책이었다. 그리고 그리멜스하우젠이 ≪모험가 짐플리치시무스≫의 후속편으로 내놓은 것이 이 책, ≪사기꾼 방랑 여인 쿠라셰의 인생기≫다.
지은이
한스 폰 그리멜스하우젠(Hans J. C. von Grimmelshausen, 1621?~1676)의 생애는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개신교 도시인 겔른하우젠(Gelnhausen)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이후 군대에서 30년 전쟁을 몸소 체험하면서 이후 그의 대표작이 될 ≪짐플리치시무스≫ 연작의 소재와 영감을 얻었다. 1649년 퇴직한 후에 오펜부르크로 돌아와서 순찰 부대 중위의 딸과 결혼했다. 변화 많은 군인에서 비교적 안정된 시민의 삶으로 넘어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스 라인하르트의 행정관 자리를 얻었고 그 후에도 샤우엔부르크 가문에서 행정직을 맡았다. 행정관으로 일했던 것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성주도 되고 주지사도 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1676년 사망한 후, 교회의 기록에는 그가 “정직하고 아주 재능이 많고 박학다식한” 남자라고 적혔다.
옮긴이
김미란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논문 <브레히트 희곡에 사용된 속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뮌헨대학에서도 수학하고, 청주대학을 거쳐 숙명여대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쾰른대학 연구교수도 지냈다. 현재 숙명여대 독일언어문화학과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탈리아의 딸들−현대독일여성드라마 작가≫, ≪독일어권의 여성작가≫(공저), ≪한독 여성문학론≫(공저)이 있고,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모테카트의 ≪현대독일드라마≫, 렌츠의 희곡 ≪군인들≫, ≪가정교사≫, 로트의 ≪나귀타고 바르트부르크 성 오르기≫,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 라 로슈의 소설 ≪슈테른하임 아씨 이야기≫, 호르바트의 희곡 ≪피가로 이혼하다≫, ≪우왕좌왕≫이 있다.
차례
동판화 설명 또는 애독자를 향한 쿠라주의 연설
짧지만 상세한 내용 소개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제11장
제12장
제13장
제14장
제15장
제16장
제17장
제18장
제19장
제20장
제21장
제22장
제23장
제24장
제25장
제26장
제27장
제28장
작가의 부록
이 책자의 진짜 이유와 요약된 내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유모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하고 내게 말했지요. “레부슈카 아가씨, 아가씨가 처녀로 남아 있으려면 머리 자르고 남자 옷을 입어야 해요, 안 그러면 아가씨의 명예를 붙잡아 묶어 놓을 수가 없어요. 그런 명령을 받았지만요.” 나는 생각했지요. ‘그 무슨 이상한 말인가?’ 하고. 하지만 유모는 가위를 가져와서 내 오른쪽 금발을 잘라 버렸어요. 하지만 왼편 머리는 그대로 남겨 두고 당시의 귀한 집 남자들 머리처럼 이리저리 만들었어요. “그래, 딸아, 내 딸이 이 소용돌이를 명예롭게 벗어나면 치장할 만한 머리칼이 아직 충분히 남아 있고, 1년만 지나면 다른 쪽 머리칼도 다시 자랄 거야.”
– 23쪽
그녀는 원기를 되찾고 정신을 차리고, 정말 흥분해서 내 출생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 줬어요. 친아버지는 백작으로, 몇 년 전에는 왕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는데, 지금은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추방당한 상태이고, 소식에 따르면 지금은 터키 술탄의 궁전에 피신해 그곳에서 종교도 기독교에서 터키 종교로 바꿨다는 말도 있었지요. 친어머니는 명예로운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하고 아름다웠다고요. 어머니는 백작부인의 시녀로 머물었는데, 어머니가 백작부인의 시중을 드는 동안에 백작이 그녀의 노예가 되어 그녀에게 귀족의 거처를 마련해 줄 때까지 열심히 섬겼고, 그곳에서 나를 낳았다고요.
– 72쪽
그렇게 나는 슈프링인스펠트를 노예로 갖게 되었지요, 밤에는 내게 더 좋은 일이 없을 때 남편 노릇을 했고, 낮에는 하인이었어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볼 때면 그는 내 주인이 되었지요. 그는 장사도 아주 잘했고 내 기분도 잘 맞출 수 있어서 내 평생 더 좋은 남편을 바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 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