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일본판 전설의 고향
이하라 사이카쿠는 그의 처녀작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 대히트를 치면서 일약 에도 시대의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세 번째 책으로 출간한 것이 일본 전국 각지에 떠돌던 신기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을 수집해 윤색하고 재창조한 ≪사이카쿠의 여러 지방 이야기(西鶴諸国咄)≫이다. 작가의 명성에 힘입어 이 책 또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이런 여러 설화류 문학작품들이 성행했다.
이 책에는 총 35편의 기이하고 신기한 작품들이 실려 있다. 에도 시대 3대 도시인 에도, 교토(京), 오사카(大坂)를 위시해 그 주변 지역인 야마토(大和, 나라현 일대)와 가와치(河内, 오사카 남동부 일대) 지방의 이야기가 적게는 2화에서 많게는 4화 이상 등장한다. 오늘날 관광 명소로 잘 알려진 가마쿠라(鎌倉)나 하코네(箱根)를 비롯해 규슈(九州) 지방과 도호쿠(東北) 지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도 있다. 등장인물들은 당시의 중심 계층이었던 무사와 상인을 비롯해 선인(仙人), 덴구(天狗) 같은 비현실 세계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 작품은 1685년에 발표되었는데 사이카쿠는 그로부터 가깝게는 30년, 멀어도 60년 전, 즉 1620년에서 1650년 무렵을 그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대부분 재창조했다. 그야말로 당대에는 발생해서 유포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따끈따끈한 최신 설화였던 것이다. 사이카쿠는 이러한 여러 지방의 최신 설화에 기존의 설화 가운데 유사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합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추가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이 작품의 가치는 ‘오래지 않은 근래의 핫한 설화’와 ‘오래된 옛날 설화’를 부분적으로 복합해 전혀 새로운 문학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는 데에 있다.
사이카쿠가 문학적 창의성을 발휘해 재창조해 낸 그 내용이 ‘온고지신’이라는 일본 문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한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옛것과 지금의 것의 조화를 통한 재창조’는 ‘남의 것과 내 것의 조화를 통한 재창조’와 더불어 일본 문학을 지탱해 온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사이카쿠의 여러 지방 이야기≫에 실린 기묘하고 흥미진진한 재창조된 이야기들을 통해 그러한 일본 문학의 오랜 전통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고전판 ‘신 전설의 고향’의 탄생이다.
이 작품에는 각 이야기마다 삽화가 실려 있다. 지극히 일본적인 이 삽화는 당대의 시대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삽화에는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암호를 담아 놓았다. 다시 말해 왜 하필 해당 이야기 속의 그 특정 장면을 굳이 삽화로 표현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면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배가된다. 역자들은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붙였다.
이 작품은 일본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일본고전명저독회>에서 번역했다. 총 28명의 연구자들이 번역에 참여했다. 그들은 35편의 이야기를 윤독하면서 많은 토론을 통해 세밀한 집필 방침을 마련해 공유했다. 그 결과 양질의 번역을 할 수 있었다. 번역자들은 단순히 본문 번역에만 그치지 않고 각 이야기마다 키워드를 뽑고, 도움말을 작성하고, 삽화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따라서 이 작품이 일반 독자뿐 아니라 자료로 이용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이러한 집필의 구성은 일본 고전 문학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은 단편적으로만 알려지던 ≪사이카쿠의 여러 지방 이야기≫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200자평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대표 작가 이하라 사이카쿠가 전국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해 새롭게 창작한 설화 모음집이다. 등장하는 지방은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에도와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의 외진 농촌이나 산골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이고, 등장인물은 당시의 중심 계층이던 무사와 상인을 비롯해 선인(仙人), 덴구(天狗)와 같은 비현실 세계의 존재까지 매우 다양하다. 신기하고 기묘한 3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고, 각 이야기마다 삽화가 함께 실려 있다. 삽화는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지만 한편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암호가 담겨 있어 이를 짚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번역자들은 <일본고전명저독회> 소속으로 윤독을 통해 양질의 번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 번역에만 그치지 않고 각 이야기마다 키워드, 도움말, 삽화 설명을 곁들임으로써 이 작품을 자료로 이용하려는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단편적으로만 알려지던 이야기들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지은이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는 일본 근세 시대 오사카(大坂)에서 활약한 문인이다. 1642년경, 현 와카야마현(和歌山県) 나카쓰 마을(中津村)에서 태어나 15세에 하이카이(俳諧)의 세계에 뛰어든다.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웃음의 요소를 구(句)로 표현하는 단린파(談林派)를 대표하는 하이카이시(俳諧師)로 높이 평가받는다. 사이카쿠는 한정된 시간에 누가 더 많은 홋쿠(発句, 하이카이의 5·7·5 17문자)를 짓는지를 경쟁하는 야카즈 하이카이(矢数俳諧)를 창시하기도 했다. 그는 하룻밤에 2만3500수의 홋쿠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스스로를 이만옹(二万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1682년경부터는 무가(武家)와 서민의 생활 실태를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우키요조시(浮世草子)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하며 작가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우키요조시 장르에 속하는 그의 작품은 이야기의 제재에 따라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호색물(好色物), 여러 지방의 진귀한 기담(奇談)을 모은 잡화물(雜話物), 무사도(武士道)를 주제로 그린 무가물(武家物),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그린 조닌물(町人物)로 나뉜다. 각 제재별로 작품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호색물(好色物)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1682)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1686)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1686) 등
2. 잡화물(雑話物)
≪사이카쿠의 여러 지방 이야기(西鶴諸国ばなし)≫(1685)
3. 무가물(武家物)
≪무도전래기(武道伝来記)≫(1687)
≪무가 의리 이야기(武家義理物語)≫(1688) 등.
4. 조닌물(町人物)
≪일본영대장(日本永代蔵)≫(1688)
≪세간의 속셈(世間胸算用)≫(1692) 등.
사이카쿠는 1693년 9월 9일에 생을 마감했다. 유골은 오사카부(大阪府) 오사카시(大阪市) 주오구(中央区)에 위치한 세이간사(誓願寺)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유고집(遺稿集)으로는 ≪사이카쿠가 남긴 선물(西鶴置土産)≫(1793), ≪사이카쿠 오리도메(西鶴織留)≫(1694), ≪사이카쿠 속 쓰레즈레(西鶴俗つれづれ)≫(1695) 등이 있다.
옮긴이
<일본고전명저독회>는 일본 고전 문학과 명저의 윤독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다. 구성원은 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또는 대학원 일어일문학과 동문의 교강사 대학원생이며,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앞으로도 일본에 대한 근원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를 지속해 그 결과를 연구자 및 일반 대중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 책의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강운경, 금영진, 김경희, 김난주, 김두성, 김미진, 김영주, 김영호, 김정희, 김태영, 김혜진, 문명재, 문인숙, 박민정, 배관문, 백현미, 신미진, 안소영, 안유진, 양선희, 이경화, 이부용, 이신혜, 이윤옥, 최이레, 최지혜, 피석희, 홍성묵이다.
차례
머리말
권1
1화 소송에는 북을 찢어 무찌르지 않고도 이긴다
2화 외간 남자들에게 보일 수 없는 안채는 여자 목수가 수리한다
3화 연말에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4화 우산신의 계시
5화 신기한 발소리
6화 구름 속의 팔씨름
7화 여우 사천왕
권2
1화 신출귀몰하는 가마 이야기
2화 갑자기 대머리가 된 12인
3화 수맥이 지나는 길
4화 남은 것이라곤 금냄비뿐
5화 꿈길의 풍차
6화 지장보살이라 불리는 사내의 위안거리
7화 병에 걸린 번개신
권3
1화 벼룩의 통발 빠져나오기
2화 불타고 남은 옛 모습
3화 신란 스님 기일제에 얼굴에 그린 기생오라비 수염
4화 무라사키(紫) 여인
5화 보물선의 행방
6화 다다미 여덟 장짜리 연잎
7화 인과응보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권4
1화 모양새는 한낮의 연극 한 마당
2화 살며시 보낸 부채 속의 긴 노래
3화 절을 지키기 위해 덴구(天狗)가 되어 버린 스님
4화 놀라서 잠이 깨기를 서른일곱 번
5화 꿈에 교토에서 돌아오다
6화 힘없는 대불
7화 잉어가 낳은 아이
권5
1화 초롱불에 나팔꽃
2화 사랑의 분점
3화 즐거움을 주는 마고의 손
4화 기소 해변 길에서 있었던 일
5화 원념의 세찬 숨결
6화 목숨을 버리고 얻은 기름 단지
7화 돈이 떨어져 있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세상은 참 넓은 것이다. 그래서 여러 지방을 둘러보고 이야깃거리를 찾아보니, 구마노(熊野) 지방의 깊은 산속에는 온천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있다. 또 지쿠젠(筑前) 지방에는 둘이서 짊어져야 할 정도로 큰 무가 있다. 분고(豊後) 지방에서 나는 커다란 대나무는 그대로 물 긷는 통으로 쓸 정도로 크며, 와카사(若狭) 지방에는 200여 살이나 되는 몸이 하얀 비구니가 살고 있다. 오미(近江) 지방 가타다(堅田)에는 키가 7척(尺) 5촌(寸)이나 되는 거구의 여인도 있다. 단바(丹波) 지방에는 1장(丈) 2척이나 되는 말린 연어를 모신 신사가 있다. 마쓰마에(松前) 지방에는 약 100간(間)이나 되는 다시마가 있다. 아와(阿波) 지방의 나루토(鳴戸)에는 용왕의 딸이 지니고 있던 벼룻집이 있다. 가가(加賀) 지방 하쿠산(白山)에는 염라대왕이 지닌 주머니가 있다. 시나노(信濃) 지방의 네자메노 도코(寝覚の床)에는 우라시마타로(浦島太郎)가 가지고 있던 부싯돌 상자가 있다. 가마쿠라(鎌倉)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쓰던 금전 출납부가 있다. 교토(京都)의 사가(嵯峨)에는 마흔한 살이 되어서도 후리소데(振袖)를 입은 여자가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인간은 요물이고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 없다.-<서문>
2.
나이스케는 “금화는 9냥이 아니라 사실 10냥이 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사를 하는 중에 11냥으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이 중에 누군가가 원래 갖고 있던 금화를 내놓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 한 냥의 금화는 내가 맡을 이유가 없다.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라며 손님들에게 물었으나 누구 하나 이름을 대지 않은 채로 날이 밝았다. 첫닭이 울 시간이 되어 돌아가려 해도 누구 하나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이 일은 나이스케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손님들도 “여하간에 집주인의 마음에 맡깁시다”라고 했다. 나이스케는 금화를 그릇에 넣고 정원에 있는 조즈바치(手水鉢) 위에 얹은 뒤에 “금화의 주인은 금화를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손님들을 한 명 한 명 나가게 한 뒤, 그때마다 문을 닫아 7명의 손님을 7번 배웅했다. 그 후 나이스케는 조즈바치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가 자신의 금화를 가져간 것이었다.
나이스케의 즉석에서의 궁리. 앉아 있던 손님의 행동. 어찌 되었든, 무사의 교제라는 것은 각별하고 멋진 것이다.-<연말에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3.
아내는 나이스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남편이 돌아오자 그 무서웠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나이스케는 “그런 일은 전혀 기억에 없소. 당신도 생각해 보시오. 이렇게 가난한 나에게 그런 미인이 마음을 줄 리가 있겠소? 혹시 행상하며 화장품이나 바늘을 팔던 여자라면 짚이는 데가 있지만 그건 이미 다 지난 얘기이니 걱정할 필요 없소. 잠결에 뭔가 헛것이라도 본 거 아니오?”라는 말을 남기고 해 질 녘부터 다시 배를 끌고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잔물결이 일더니 거세지며 부유 해초를 가르고 나타난 커다란 잉어가 배에 올라타서는 입에서 아이 모습을 한 것을 내뱉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나이스케는 허둥지둥 도망쳐서 집에 돌아와 활어조를 보니 도모에의 모습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동물한테 너무 정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잉어가 낳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