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카구치 안고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며 전후의 출발을 장식한, 안고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백치(白痴)>는 1946년 ≪신조(新潮)≫ 6월호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안고가 살던 가마타(蒲田) 변두리에 있는 공장 단지 주변과 일본 영화사의 촉탁으로 있던 경험이 소재가 되었다. 요설체인 듯하면서도 3인칭 객관 묘사라는 독특한 문체로 전쟁의 참상과, 전쟁으로 인해 인간의 독창성과 의지가 사라져 동물과 등가로 전락해 버린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폐망해 가는 땅에서 남자와 여자가 타락해 가는 묘사를 통해 윤락 속에서 인간의 원점을 발견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타락론>(≪신조≫ 4월호)의 윤락(淪落) 사상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올바르게 타락하는 길을 타락할 데까지 타락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해야 한다는 <타락론>의 주장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잘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론>은 전쟁 패망 후의 인간의 출발점을 추구한 선언서이고, 이 소설은 패전 직전 인간을 막다른 데까지 몰아넣고 바라본 작품이라는 점에서, <백치>가 <타락론>의 소설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안고가 ‘백치’라는 존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자전적인 단편 <돌의 생각(石の思い)>[≪빛(光)≫, 1946. 11)]에는 사촌 형네 집 하녀의 자식인 백치와 친하게 지내던 추억이 묘사되어 있다. 끝내는 집도 절도 없이 거지로 떠돌아다니다 정신 병원에서 숨을 거둔 ‘백치의 애달픔을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길 만큼 그 백치에 대한 인상은 각별했고,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백치 여자의 이미지가 소설로 처음 부각된 것은 <남풍보(南風譜)>(1938. 3)에서다. 불상과도 같은, 마물과도 같은, 성속(聖俗) 양의적인 이미지를 지닌 여자가 나오는데, 육욕덩어리인 <백치>의 사요를 미치광이 남자가 순례길에 만났다는 설정은 그런 이미지를 암시하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인도 철학을 공부한 만큼 인간과 신의 양면성을 지닌 힌두교의 크리슈나의 이미지가 안고의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사카구치 안고의 문장은 몹시 불편하다. 단어나 문구의 반복·중복이 많고, 불필요한 접속사도 많아 한 번 쓰고는 퇴고를 거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장황해서 내용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장문의 나열, 서두와 어말이 맞지 않는 문장도 수두룩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문맥이 통하는 내용으로 다듬을까 고민했고, 단문으로 잘라 번역하고 싶은 유혹도 자주 느꼈다. 작가의 의도를 살린다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의문이 몹시 자주 들었다. 그러나 요설체의 장황한 문장이 안고의 특징이자 무뢰파로서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최대한 살리자고 마음먹었다. 다만 아무 부호도 없이 지문과 연결된 대화체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위해 따옴표를 넣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작가로서의 안고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의 특색을 인상 깊게 뇌리에 남긴다면 번역자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200자평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무뢰파로 불리는 사카구치 안고는 타락을 통해 진정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타락론으로 전후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안고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백치(白痴)>부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까지,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안고의 대표작 다섯 편을 골라 엮었다.
지은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 현(新潟県) 니시오하타(西大畑)에서 지방 정치가이자 한시인(漢詩人)이던 진이치로(仁一郎)와 그의 후처인 아사 사이에서 열세 형제 중 열둘째(5남)로 태어났다. 이름은 병오년에 태어난 5남이라는 의미에서 헤이고(炳五)가 되었다. 안고라는 필명은 중학교 한문 시간에 선생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두운 놈’이라는 의미로 ‘안고(暗吾)’라는 별명을 붙인 데서 유래했다.
1925년 스무 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학교 분교의 대용 교사(자격증이 없는 교원)로 근무했으나 안온한 교사 생활보다 구도자의 길에 대한 동경이 커져, 1926년 3월 도요대학 인도 철학과에 입학했다.
1930년 아테네 프랑세즈의 문우들과 동인지 ≪말(言葉)≫을 창간해 이듬해 제2호에 처녀작 <찬 바람 부는 술 창고에서(木枯の酒倉から)>를 발표했고, ≪청마(青い馬)≫로 동인지명이 바뀐 후 <고향에 부치는 찬가(ふるさとに寄する讚歌)>, <바람 박사>,<구로타니 마을(黒谷村)> 등을 발표해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의 절찬을 받고 참신한 주제와 기법으로 무장한 신예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의욕적으로 수작을 발표했다.
1945년 일본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두 눈으로 지켜보겠다며 도쿄에 남아 있던 안고는 1946년 ≪신조(新潮)≫ 4월호에 <타락론>을, 6월호에 <백치>를 발표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타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타락론>은 패전 후의 혼미 속에서 재빨리 전후의 본질을 파악하고 통찰했다는 점에서 일약 전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이때부터 안고에게는 집필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외투와 푸른 하늘>, <여체>, <사랑을 하러 가다> 등 종래의 육체를 사상(捨象)한 사상이나 관념에 맞서, 육체 자체가 사고하는, ‘성의 사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안고는 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이시카와 준(石川淳) 등과 함께 신희작파, 무뢰파라고 불리며 전후 난세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유행 작가, 평론가가 되었다.
<돌의 생각>,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 같은 걸작을 썼고, 결혼 후 아내의 헌신적인 모습을 슬프게 그린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전후 풍속을 파헤친 <금전무정(金銭無情)> 등을 썼으며, 한편으로 <도경(道鏡)>, <오다 노부나가> 같은 역사 소설, ≪불연속 살인 사건≫(제2회 탐정 작가 클럽상) 같은 추리 소설에도 도전했다.
1949년 2월 수면제와 각성제 중독 증상이 심해져 도쿄대학 병원 신경과에 입원했다. 일상생활에서 광포하고 착란적인 행동이 이어진 가운데, 1950년부터 2년간 전후 문화와 메이지 개화기 문화의 경박성을 비판하며 토착적인 인간성을 파헤친 문명 비평서 <메이지 개화 안고 포물첩(安吾捕物帖)>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다. 그와 동시에 ≪문예춘추≫지에는 천황제, 공산당을 비롯한 터부에 도전하며 <안고 항담(安吾巷談)>(문예춘추 독자상)을 연재하는 등 독자적인 문명론을 전개했다. 또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해 천황가가 조선계라는 것, 조선의 역사가 일본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독자적인 고대사를 구상해 <안고 사담(安吾史譚)>, <안고 신일본 지리>, <안고 신일본 풍토기> 등 탁월한 사관을 전개했다. 이른바 ‘안고물(安吾物)’로 일컬어지는 이 연작 문명 비평서는,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통쾌히 해소하며 독자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어 안고는 인기 평론가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1953년 8월 장남 쓰나오(綱男)의 탄생으로 비로소 자신이 일가를 이루었음을 실감한 후, 고대사의 웅대한 구상과 함께 원풍경에 유래하는 창작 활동에 의욕을 불태우던 안고는 1955년 2월 17일 아침 자택에서 뇌출혈로 급서했다. 향년 49세. 안고의 죽음에 대한 반향은 전후 최대의 유행 작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쓸쓸한 것이었으나, 1970년 무렵부터 젊은이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면서 안고는 대대적으로 부활했다.
옮긴이
1970년대 중반에 일본어가 전도유망할 것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상명여자사범대학교 일어교육과에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유은경은 교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 갔다.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의 권위자 야스카와 사다오(安川定男) 교수를 사사하러 주오대학(中央大學) 박사 과정에 진학, 유학비는 장학금 및 한국어 강좌, NHK 방송국의 국제국 아나운서, 통역 등의 아르바이트로 조달했다. 귀국 후 대구의 효성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 문학 수업을 준비하다가, 국내에 일본 문학을 소개한 책자가 없음을 알게 되어, 이토 세이(伊藤整)의 ≪문학 입문(文學入門)≫을 ≪일본 문학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그때부터 번역의 재미를 알게 되어 문학 작품의 연구보다는 원작자의 의도에 충실한 번역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유래로 배우는 일본어 관용구≫, ≪소설 번역 이렇게 하자≫(2012년도 문화관광부 우수 도서), ≪유머로 마스터하는 일본어≫가 있고, 공역을 제외한 번역서로는 ≪일본 사소설의 이해≫, ≪고바야시 평론집≫(2004년도 학술원 우수 학술 도서), ≪취한 배≫,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물방울≫, ≪어떤 여자≫, ≪문≫, ≪도련님≫, ≪마음≫ 등이 있으며, 오역 관련 논문이 다수 있다.
차례
백치(白痴)
외투와 푸른 하늘(外套と青空)
돌의 생각(石の思い)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青鬼の褌を洗ふ女)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일본은 지고 미군은 본토에 상륙해 일본인 태반이 사멸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하나의 초자연의 운명, 소위 천명처럼 여겨졌다. 그에게는 그러나 더 비소(卑小)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놀라우리만치 비소하면서도 늘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떠나지 않았다. 바로 그가 회사에서 받는 200엔 정도의 급여 말인데, 급여를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까, 내일이라도 목이 잘려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그는 월급을 받을 때가 되면 해고 선고도 받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고, 월급봉투를 받아 들면 목숨이 한 달 연장돼 어이없을 만큼 행복감을 맛보았지만, 그런 비소함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예술을 꿈꾸었다. 예술 앞에서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 월급 200엔이 어째서 뼛속에 사무치며 생존의 근저를 뒤흔들 만큼 큰 고민거리가 되는 걸까? 생활의 외형적인 면뿐 아니라 그의 정신도 영혼도 200엔에 제한당해 비소함을 응시하며 미치지도 않고 태연하게 산다는 게 더욱더 한심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노도의 시대에 미가 무슨 소용이야! 예술은 무력해!”라던 부장의 어처구니없는 고함 소리가 이자와의 가슴에 완전히 다른 진실을 담아 예리하고도 거대한 힘으로 파고든다. 아아, 일본은 질 것이다. 찰흙 인형이 무너져 내리듯 동포들이 픽픽 쓰러지고, 튕겨 오르는 콘크리트나 벽돌 파편들 속에 수많은 다리니 목이니 팔이 함께 날아올라 나무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어디로 피하려다 어느 구멍으로 몰려 구멍째 단번에 날아가 버릴는지…. 꿈같은, 그렇지만 만일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때의 신선한 재생을 위해, 그리고 전연 예측할 수 없는 신세계, 돌 부스러기 천지인 들판에서 하게 될 생활을 위해 이자와는 오히려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런 생활은 반년 내지 1년 후면 맞닥뜨리게 될 운명이련만, 맞닥뜨릴 운명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꿈속 세계처럼 아득한 유희로밖에는 인식되지 않았다. 눈앞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살아갈 희망을 뿌리째 뽑아 가는 단돈 200엔의 결정적인 힘, 꿈속에서마저 200엔에 목이 졸려 가위눌리고, 아직 스물일곱 살인 청춘의 모든 정열이 표백되어 현실적으로 이미 암흑의 황야를 망연히 걷고 있을 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