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회 개혁을 주제로 한 게오르크 카이저 가스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 〈산호〉는 아직 순수한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억만장자는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집념으로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끊임없는 도피의 인생을 산다.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된 뒤로는 한 달에 한 번 “열린 목요일”에 불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나누어 주지만 결코 이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과 꼭 닮은 비서가 억만장자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 억만장자와 비서는 놀랄 만큼 닮았다.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비서의 시곗줄에 달린 산호뿐이다. 비서는 억만장자를 현실의 카오스로부터 보호하는 외적 분신인 것이다. 한편 억만장자의 아들은 그의 이상적 자아를 대신하는 내적 분신이다. 억만장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겪은 고난과 궁핍을 아들에게는 대물림하지 않으려 애쓴다. 대신 자신이 갖지 못한 청년기의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려 한다.
결국 억만장자는 내적, 외적 분신을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 고통과 고난이 없는 세계로 도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억만장자의 도피는 지속되지 못한다. 아들은 밝은 빛의 세계를 박차고 나가 노동하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리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럼에도 억만장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출발점을 바로잡는 것, 그러니까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내 것으로 가지는 것, 억만장자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억만장자와 꼭 닮은, 하지만 억만장자와는 달리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비서가 지녔던 ‘산호’는 억만장자에게는 가난과 불행, 공포와 고통이 없는 원초적인 삶을 의미하며, 동경하는 낙원의 고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억만장자가 현실에서 도피해 꿈꿔 왔던 이상 세계로 숨어든다고 해서 극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카이저는 억만장자가 어쩌지 못한 문제, 어린 시절 불행의 원인이 된 사회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억만장자의 아들에게 쥐여 주며 새로운 세대에 희망을 건다.
200자평
게오르크 카이저는 1918년 이후 사회 개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산호>, <가스> 그리고 <가스 2>로 구성된 “가스 삼부작”이 대표적이다. 삼부작은 개개인의 운명, 즉 억만장자, 억만장자 아들, 억만장자 노동자의 운명을 통해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이 인간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지은이
게오르크 카이저(Georg Kaiser, 1878∼1945)
1878년 11월 25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인 프리드리히 카이저와 부인 안토니 안톤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한 불만으로 김나지움을 중퇴한 후 3년간 상업 수업을 받았다. 서점과 수출입상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면서도 항상 플라톤과 니체를 읽고,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듣기를 좋아했다. 1898년에 카이저는 석탄 운반 인부로서 화물선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가서 3년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에게(AEG) 지사의 경리 사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말라리아에 걸려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는 주로 마그데부르크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25세에 첫 작품으로 희비극 <클라이스트 교장>을 발표했다. 1908년 10월에 카이저는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의 마르가레테 하베니히트(Margarethe Habenicht)와 결혼해 제하임 안 데어 베르크슈트라세로 이사했으며, 1911년에는 바이마르에도 겨울을 날 별장을 갖게 되었다. 1915년에 처음으로 그의 작품 <학생 페게자크 사건>이 빈에서 공연되었다. 1917년 <칼레의 시민들>과 <아침부터 자정까지>의 초연으로 카이저는 극작가로서 최초의 성공과 명성을 얻는다. 이후 카이저의 작품 중 40편 이상이 세계 각국에서 초연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적 극작가로 부상한다. 1944년에 세 편의 그리스 희곡들 중 마지막 작품인 <벨레로폰>을 끝내고 소설 ≪아르트≫를 집필하던 중 1945년 6월 4일에 혈관이 막히는 색전증으로 아스코나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김충남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뷔르츠부르크대학 및 마르부르크대학교 방문교수, 체코 카렐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프란츠 카프카 : 인간·도시·작품》, 《표현주의 문학》이,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병사 다나카》, 《구원받은 알키비아데스》, 《유대인 과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프리드리히 헤벨의 《니벨룽겐》, 슈테판 하임의 《6월의 5일간》, 《다윗 왕에 관한 보고서》, 일제 아이힝거의 《더 큰 희망》,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톨레도의 유대 여인》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응용미학으로서의 드라마−쉴러의 〈빌헬름 텔〉 연구〉, 〈신화의 구도 속에 나타난 현재의 정치적 상황−보토 슈트라우스의 드라마 〈균형〉과 〈이타카〉를 중심으로〉, 〈최근 독일 문학의 한 동향−페터 슈나이더의 경우〉, 〈베스트셀러의 조건−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경우〉 등이 있다. 그 밖에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아들 : 불현듯 실상을 깨달았어요. 우리가 범하는 모든 부당한 일이 분명하게 나타났어요. 우리 부자들이 저지르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인 다른 이들이 연기와 고통 속에서 질식할 지경인데.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전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죠? 왜요?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해 보세요.
55쪽
억만장자 : 그대들은 나를 여기서 끌어내려 하지만,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당신들은 나의 확신을 더 굳게 했을 뿐이에요. 나를 그냥 이 뜰에 내버려 두어요. 여기서도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어요. 당신들의 싸움터를 찾도록 해요. 평화가 자칫 전쟁으로 번질지도 몰라요. 살육의 현장에선 누구나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요. 당신들은 나를 도우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 운명은 스스로 주도하기로 했지요. 이제 내가 당신의 지원을 거부한다면, 내게 화를 내도 좋아요.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