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당대 최고의 학문을 익힌 엘리트, 한스 라이헨바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독일의 학문 수준은 서양 문화권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철학, 수학, 물리학 등에서 걸출한 학자들이 배출되고 있었으며, 수학자와 물리학자를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주제가 갖는 철학적 의의에 대해 토론하는 데 거부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활발하고 진지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대학에 입학한 한스 라이헨바흐는 수리물리학자 막스 보른,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등의 지도 아래 수학, 물리학, 철학을 연구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의 역작,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를 국내 최초로 번역해 출간한다.
라이헨바흐와 상대성 이론
원래 라이헨바흐는 자연 탐구에서 경험에 선행해 경험의 틀을 짓는 인간 인식의 선험적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칸트의 자연철학적 관점을 따랐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고 과학자들의 선험적 원리가 부정된 후, 칸트의 자연철학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분석’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새로운 자연철학을 수립하기 위한 출발을 알렸다.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지식을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자연과학에 대한 정합적이고 일관된 인식론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학 지식으로서 상대성 이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종류의 해석들이 나오던 1920년대, 라이헨바흐는 새로운 종류의 자연철학이 이러한 논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상대성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분석 작업을 진행했다.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서 자연철학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당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등과 교류하며 상대성 이론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했고, 그 결실로 1924년에 출판된 저서가 이 책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다.
자연철학의 방향을 제시한 책
자연철학자는 하나의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연관되며 인간은 이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지와 같은 인식론적 관심을 갖고 물리학 이론에 접근한다.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수학적인 간결함과 우아함을 목적으로 공리화를 진행한다면, 자연철학자는 분석 대상이 되는 물리학 이론의 인식적 구조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공리화를 진행한다.
라이헨바흐는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를 통해 상대성 이론의 경험적 토대, 즉 공리가 무엇인지를 밝혔으며, 이러한 경험적 공리들뿐만 아니라 상대성 이론이 의존하고 있는 임의적이고 규약적인 정의들이 무엇인지도 밝혔다. 또한 가장 일반적인 경우에도 시간 순서의 위상적 공리들이 여전히 적용됨을 밝힘으로써, 인과성이 시공간 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사실을 보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론들이 철학적 관점에서 과학 이론을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얻어졌다는 점이다.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면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유의미한 철학적 귀결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노력의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자연철학이란 어떤 학문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인간과 세계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는 점에 이 책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200자평
상대성 이론 이후, 자연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다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오고, 1916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이 나온 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칸트의 인식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당대의 자연과학자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나누며 논리경험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한스 라이헨바흐는 바로 이 ‘상대성 이론’을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상대성 이론에서 제시된 원리들과 개념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이론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1924년에 발표한 이 책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는 자연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지은이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
1891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지만 개신교로 개종한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교사 출신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5남매 중 셋째였던 라이헨바흐는 어린 시절부터 지적 재능이 비상해 대학 입학 전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기술자가 되기를 꿈꿨던 그는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공학이 그 스스로의 지적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공을 변경했다. 베를린대학, 괴팅겐대학, 뮌헨대학 등을 거치며 수리물리학자 막스 보른,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 등의 지도 아래 수학, 물리학, 철학을 연구했다.
1915년, 수학적 확률 이론을 물리적 세계에 적용하는 문제를 주제로 삼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통신회사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계속했다. 1919년에 베를린대학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첫 세미나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학계로 돌아갔다. 자연철학 교수로서 당대의 자연과학자들과 활발한 지적 교류를 나누며 베를린대학을 중심으로 이른바 ‘논리경험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라이헨바흐는 철학이 사변적인 개념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동의하며 상호 협력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를린대학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에 적용될 수 있는 확률 이론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당시 뜨거운 논쟁의 주제였던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 또한 진행했다. 나치의 정치적 압력을 피해 1933년부터 5년간 터키의 이스탄불대학 철학과 학과장을 맡은 라이헨바흐는, 이 시기에 자신 고유의 확률 이론과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터키의 학문적 환경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자연과학적 성과들을 과학자들과 공유하고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라이헨바흐의 기대에 다소 미치지 못했다.
미국의 철학자 찰스 모리스(C. Morris) 등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193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철학과에 재직하게 된 라이헨바흐는, 1953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철학적 탐구를 진행했다. 그는 확률 이론, 기호논리학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철학 분야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간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과학 이론이었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면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인식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유의미한 철학적 귀결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라이헨바흐가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을 분석함으로써 얻은 철학적 결론들과 주제들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연구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옮긴이
강형구는 1982년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산행을 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부산과학고등학교(현 한국과학영재학교) 8기로 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며 과학의 역사와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01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진학해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육군 학사장교 46기(통신병과)로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진학,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자인 한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 분석을 연구한 논문 <라이헨바흐의 ‘구성적 공리화’−그 의의와 한계>로 2011년에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월부터 2017년 7월까지 교육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했으며, 2017년 7월부터 지금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연구원이자 학예사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계속 공부하며 한스 라이헨바흐의 자연철학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한스 라이헨바흐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2015, 지식을만드는지식), ≪원자와 우주≫(2017, 지식을만드는지식), 리처드 뮬러의 ≪나우 : 시간의 물리학≫(2019, 바다출판사, 공역)이 있다.
차례
영어판 서문
머리말
감사의 글
도입
제1절 : 공리들의 논리적 지위
제2절 : 정의들의 논리적 지위
제3절 : 공리화의 결과에 관한 잠정적 소견
제4절 : 일치
제1부 특수 상대성 이론
제1장 공리들과 계량의 구성
제5절 : 실질점과 신호의 개념
제6절 : 시간 순서의 공리들
제7절 : 시간 비교의 공리들
제8절 : 공간적 근방과 근방에 있는 시계의 비교
제9절 : 페르마의 공리
제10절 : 정상 상태 공리
제11절 : 순환 이동 공리
제12절 : 공간 계량에 관한 빛 공리
제13절 : 실질점의 상대적 정지에 관한 정의 12의 유일성 증명
제14절 : 균일하게 움직이는 계들
제15절 : 로렌츠 변환
제16절 : 관성계의 운동 상태
제17절 : 로렌츠 변환에 포함된 조건들의 요약
제18절 : 물질적인 계량적 사물들
제19절 : 물질 공리들
제2장 비판적 고찰
제20절 : 공리들의 실험적 입증
제21절 : 광속 일정 원리에 대한 검토
제22절 : 절대적 시간
제23절 : 절대 운송 시간
제24절 : 가로지름 도플러 효과
제25절 : 절대 신호 시간
제26절 : 비실재적 신호
제27절 : 절대 시간 정의를 위한 두 가지 추가적인 시도
제28절 : 빛보다 느린 속도를 이용한 동시성 정의
제29절 : 공리들의 일관성, 최소성, 독립성
제2부 일반 상대성 이론
제3장 공리와 계량의 구성
제30절 : 무한소 영역에서의 계량에 대한 예비적인 수학적 논의
제31절 : 무한소 영역에서의 보존 변환
제32절 : 일반 이론의 내용
제33절 : 일반 이론의 시공간 공리들
제34절 : 공리 XI.1의 타당성
제35절 : 공리 XI.2의 타당성
제36절 : 중력장에서의 빛 기하학
제37절 : 단위 측정 막대의 특성 길이
제38절 : 일반적인 경우의 계량의 구성
제4장 전체적 속성들
제39절 : 문제
제40절 : 정적 장
제41절 : 단위를 운송할 수 있는 시간 정의
제42절 : 적색 편이, 빛의 휘어짐, 수성의 근일점
제43절 : 정상 상태의 장
제44절 : 회전하는 원판
제45절 : 정상 상태의 장(계속)
제46절 : 실질계
제47절 : 실질계에서 공리 I과 II의 타당성
제48절 : 가장 일반적으로 허용 가능한 계
공리 목록
정의 목록
정리 목록
색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필자의 연구는 기초적인 사실들(elementary facts)을 공리들(axioms)로 삼음으로써 출발한다. 이 모든 사실들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이론적 고찰에 의한 특정한 실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처리 방식(또는 분리)은 그 자체로 합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필자가 그 기초를 연구하고자 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에서의 한 혁신이기 때문이다.
– 8쪽
이론의 공리적 표현은 상대성 이론의 어떤 주장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었는지에 관한 물음을 탐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한번 공리적 체계가 구성되고 나면 공리들에 대한 실험적인 입증만이 시험될 필요가 있다. 특정한 주장에 의해 어떤 공리들이 전제되어 있는지가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공리가 실험적으로 입증되는 동시에 그러한 주장의 경험적 참 역시 결정된다. 다른 한편, 특정한 귀결이 입증되지 않았음이 밝혀진다면 어떤 공리가 위배되었고 어떤 공리와 정의가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지를 지시할 수 있다. 필수적인 전제는 공리들 사이의 상호적인 독립성이며, 이는 공리적 체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 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