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상시(嘗試), 새로운 시 형식에 대한 도전
후스는 중국의 신문학운동을 주도했던 시인으로, 백화문학의 이론을 세우고, 그에 따라 창작하고, 외국 문학을 번역하는 등 중국 문학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그가 시집의 제목을 ≪상시집≫이라고 했던 것은 자서(自序)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가 했던 말의 의미를 뒤집어서 취한 것이다. 즉, 육유가 ≪검남시고(劍南詩稿)≫ 제3권 마지막 시에서 “시험 삼아 해보다가 성공한 적은 자고로 없었다(嘗試成功自古無)”라고 한 시구를 보고 후스는 그 말의 이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고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시험 삼아 해보던 중에 있었다”라고 의미를 바꾸어, 자신의 ‘시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상시집(嘗試集)≫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상시집≫에 실린 시들은, 주로 시 형식 면에서 ‘상시(嘗試)’의 발전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 주고 있다. 즉 후스가 “시체(詩體) 대해방”이라는 창작 실천을 ‘개량’ 단계에서 ‘혁명’ 단계로 발전시켜 가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들은 대부분 시형(詩形)과 운율 면에서 구의 장단에 관계없이, 평측에 구속됨이 없이 자연스러운 음절과 운(韻)을 운용했다.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한 백화문학
≪상시집≫의 작품들은 과학·민주를 주창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신문화운동과 문학혁명의 기본 목적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개별 작품들은 봉건·전제를 반대하고 민주와 자유를 동경하며, 시국을 비판하거나(<“권위”>·<어려움을 당한 별>·<돌>·<쌍십절 귀신의 노래(雙十節的鬼歌)>·<고인(死者)>),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혁명 열사를 기리고(<네 열사 무덤 위 글자 없는 비석의 노래(四烈士塚上的沒字碑歌)>·<황커창 선생을 애도하며>), 봉건적인 관습의 폐해를 비판하며(<공자(孔丘)>·<예(禮)!>·<나의 아들(我的兒子)>), 자산계급의 개성 해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표현(<산에 오르다>·<비둘기>)하고 있다. 또한 노동 계급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하고(<인력거꾼>, <평민학교의 교가(平民學校校歌)>), 위대한 중국을 위해서 신문학을 추구하자는 희망과 포부, 그리고 애국주의 감정 등을 내세운다(<문학 편>·<심원춘>(서시)·<상시 편(嘗試篇)>).
200자평
후스가 지은 ≪상시집≫은 중국 최초의 현대시집으로 꼽힌다. 5·4운동 이후 새로운 중국을 꿈꾸던 당대 지식인들의 노력이 백화시라는 형식으로 승화된 것이다. 본문과 함께 실린 한문을 통해, 기존의 한시와는 형식 면에서 크게 달라졌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내용 면에서는 한시의 전통적인 정서를 계승하면서도, 급변하던 시대상,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던 지식인들의 교류, 그들의 이상과 처음 길을 걷는 이로서의 고독함 등을 전한다.
지은이
후스는 중국의 5·4문학혁명을 제창했던 사람으로, 사상가요 교육자요 현대 시인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쓰미(嗣糜)이며, 자(字)는 스즈(適之)다. 그의 부친은 안후이성(安徽省) 지시(績溪) 출신으로 청나라 말에 지방 관리를 지냈으며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고, 모친은 농촌 출신이었다. 후스는 1891년 12월 17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1895년, 후스는 고향의 종가 문중에서 개설한 학당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공부했으며, 아홉 살 때부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홍루몽(紅樓夢)≫ 같은 소설을 읽었다. 1904년에 상하이로 가서 영어와 서방의 자연과학을 배웠고, 옌푸(嚴復)가 번역한 영국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과 량치차오(梁啓超)의 ≪신민설(新民說)≫ 등을 통해 안목을 넓혔다. 중국공학(中國公學)에 재학할 때 그는 경업학회(競業學會) 활동과 함께 <경업순보(競業旬報)> 편집을 맡아 백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구체시(舊體詩)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자연과학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과 사학의 길을 택했다.
1910년 미국으로 간 그는 코넬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하다가 뒤에 문학과 철학으로 바꾸어 1914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컬럼비아대학교로 가서 철학자 존 듀이의 학생이 되어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을 배웠다. 1917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스는 같은 해에 귀국해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영문학과 주임 및 문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당시 베이징대학교의 교장이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외국에서 유학한 신파(新派)들을 초빙해 개혁에 큰 뜻을 두었다. 이에 후스를 중심으로 한 신지식인들은 천두슈(陳獨秀)가 편집장으로 있던 월간 <신청년(新靑年)>을 진지로 삼아, 민주와 과학을 선전하고 신문화운동과 문학혁명을 앞장서 외쳤다.
그는 백화문을 정식 문학 언어로 삼아, 구문학을 탈피하고 신문학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도데·모파상·입센 등의 외국 작품들을 번역, 소개했으며, 백화문학 창작에 솔선수범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직전에 주미 중국대사를 지내다가, 1945년에 귀국해 베이징대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49년에 공산당 정부가 대륙의 정권을 잡게 되자 후스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생활했다. 지내다가 1958년 대만으로 돌아와 국립중앙연구원 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다가 1962년에 사망했다.
옮긴이
한상덕(韓相德)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경상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1983), 성균관대학교 중문과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1985). 중국예술연구원 화극(話劇)연구소 방문학자 1년을 거쳐(1994), 중국 우한(武漢)대학교 중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97). 중국 후베이(湖北)대학교 중문과 교수를 지냈으며(1998), 중국 후베이사범대학교 중문과 석좌교수를 지냈다(1998). 현재는 경상대학교 중어중문과 교수와 중국 칭다오(靑島)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양 한시 감상≫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고, ≪중국 현대 희극사≫ 등 20여 권의 번역서가 있으며, <조우삼부곡> 등 2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차례
제1편
나비 蝴蝶
주징눙에게 贈朱經農
한가위 中秋
강 위에서 江上
황커창 선생을 애도하며 黃克强先生哀辭
12월 5일 달밤에 十二月五夜月
심원춘 沁園春
병석에서 둥슈의 편지를 받고 病中得冬秀書
“허드슨의 아침”으로 수융에게 답하다 “赫貞旦”答叔永
생사자 生査子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편 景不徙篇
친구 편 朋友篇
문학 편 文學篇
백자령 百字令
제2편
비둘기 鴿子
까마귀 老鴉
싼시로 가던 중에 눈 속에서 단풍잎을 보고 三溪路上大雪裏一個紅葉
신혼 잡시 新婚雜詩
올드 로빈 그레이 老洛伯
너 잊지 마라 你莫忘記
여몽령 如夢令
12월 1일 급하게 상을 치르러 집에 가다 十二月一日奔喪到家
가두지 못하리! 關不住了!
희망 希望
“마땅히” “應該”
별 하나 一顆星兒
“권위” “威權”
짧은 시 小詩
낙관 樂觀
산에 오르다 上山
어려움을 당한 별 一顆遭劫的星
제3편
쉬이쑨 許怡蓀
웃음 一笑
우리 세 친구 我們三個朋友
호수에서 湖上
예술 藝術
예외 例外
꿈과 시 夢與詩
예! 禮!
11월 24일 밤 十一月二十四夜
우리 함께 태어난 날 我們的雙生日
취함과 사랑 醉與愛
평민학교의 교가 平民學校校歌
네 열사 무덤의 글자 없는 비석의 노래 四烈士塚上的沒字碑歌
고인 死者
쌍십절 귀신의 노래 雙十節的鬼歌
희망 希望
새벽 별 편 晨星篇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노랑나비 두 마리, 쌍쌍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무슨 일인지, 갑자기 한 마리가 되돌아온다.
남은 한 마리, 외톨이 되어 너무나 불쌍하다.
그 역시 날아오를 마음 접으니, 하늘은 너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