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성이 머릿속에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인공지능이 봉착한 ‘프레임 문제’, 인지심리학이 아닌 상황인지론으로 새롭게 접근해야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의 지식’을 머릿속 ‘실체’로 상정하고 그것이 발휘되는 것이 ‘지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지각관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물려받은 유산이며, 이는 현대의 주류 심리학 연구인 인지심리학의 사상적 기반이기도 하다. 실제로 현대의 인공지능연구는 인지심리학에 기초해 막대한 지식을 컴퓨터에 담아 여러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왔다.
그러나 인지심리학의 관점은 오늘날 인공지능이 마주하는 프레임 문제(frame problem)를 해결하지 못했다. 여기서 프레임 문제란 ‘어떤 행위에 관련된 것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환경 속에서 구별하는 문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행위에서 환경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처리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행위에 관한 것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작업을 인지심리학 기반으로 설계된 로봇이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인지심리학적 ‘지식’을 부여받은 로봇은 현실 속 넘쳐나는 막대한 정보 중 현재 행위와 관련 있는 이른바 ‘상식’을 픽업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을 지각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추론,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인지심리학적 관점, 혹은 ‘표상주의’의 관점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고정된 ‘스냅사진’이 아니라 주변과 섞이고 늘 새롭게 바뀔 수 있는 ‘스케치’ 같은 무엇이다. 인간은 주변의 요청에 따라 바뀌는 존재일 뿐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창의에 의해서 스스로를 바꾸어 가는 존재다. 인간과 세상은 서로 끝없는 ‘피드백(feedback)’ 과정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환경을 객체가 아닌 우리와 함께 역동하는 상호관계 자체로 보는 것이 상황인지론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는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의 생태주의심리학, 야콥 폰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üll)의 생물학적 관점 등 상황인지론에 입각한 새로운 환경 개념을 살피며, 이 새로운 환경 개념이 기존 인지심리학과 인공지능연구가 마주한 프레임 문제에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는지를 살핀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AI, 로봇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지식’과 ‘환경’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제공할 것이다.
200자평
상황인지론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데카르트적 사고와 그 유산을 물려받은 인지심리학의 안티테제 위치에 있다. 상황인지론은 인지과정을 객관화된 실체인 ‘지성’이 아닌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설명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체, 지각, 인식, 사고, 행위와 상황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 이 책은 인지심리학을 기초로 한 기존의 AI, 로봇, 환경, 심리 연구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상황인지론을 통해 설명하며, 상황인지론이 기존 인지심리학의 난점들을 극복하고 인지론의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은이
박동섭
독립연구자.
‘○○ 연구자’라는 제도화된 아이덴티티로 살아가는 일의 한계를 실감하며 ‘아이덴티티 상실형 인간’으로 살고 공부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비고츠키를 연구하며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동사로 살다, 레프 비고츠키, 해럴드 가핑클, 회화분석,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을 썼고, 보이스 오브 마인드, 수학하는 신체,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스승은 있다, 망설임의 윤리학,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지성의 조건은?
01 마음의 발명
02 표상주의와 상황인지
03 표상 없는 지능
04 행위로서의 인식
05 로봇에게 결여되어 있는 지성
06 무시라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행위
07 야구 글러브가 아닌 권투 글러브
08 콘텍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09 상황인지와 어포던스
10 ‘생태’라는 이름의 분석단위
책속으로
인지심리학과 초기 인공지능 연구는 실체화된 우리 인간들이 실제의 흐름(예컨대 상황의 변화)에서 면제받은 영역에 좌정한 다음, 지나가는 진리들을 덥석덥석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이런 환상은 이를테면 ‘인간중심적 실체주의’의 덫에 물린 셈이다.
_ “머리말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지성의 조건은?” 중에서
삶의 구체성과 그 이질적인 질감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수학과 실험으로 설명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 속에 생명력이 없는 상(예컨대 표상)들을 진열해 놓은 것이다. 그런 지적 전통의 흐름에 바로 데카르트가 발명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관’은 지금도 사람들의 ‘사고’를 사로잡고 있다.
_ “01 마음의 발명” 중에서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üll)이 말하듯이, “객관적으로 규정된 숲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산림관의, 사냥꾼의, 식물학자의, 산책하는 사람의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어버린 메르헨(märchen)의 숲뿐이다”.
_ “04 행위로서의 인식” 중에서
로봇에게는 불가능하고 인간에게만 가능한 또 하나의 지성은 ‘건너뛰기 능력’ 혹은 ‘무시’하는 능력일 것이다. 예컨대 책을 읽는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오면 인간은 그 대목을 건너뛸 수 있다. 이런 능력은 인간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의미 없는 정보 그리고 지금 당장 의미를 알 수 없는 정보를(때로는 무시한다는 의식 없이) 무시할 수 있는데, 인간의 지성과 로봇 지성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_ “05 로봇에게 결여되어 있는 지성” 중에서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따라서 보는 즉시 퇴치해야 한다고 여기는 ‘바퀴벌레’와 같은 ‘해충’의 의미는 애당초 바퀴벌레 안에 내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의미는 인류가 바퀴벌레와 공생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머릿속에 고정불변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가?
_ “09 상황인지와 어포던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