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광계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에 비해서 지금까지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해 왔다. 서광계가 사망한 5년 뒤인 1638년, 진자룡(陳子龍)의 《명경세문편》에 처음으로 그의 글 33편이 수록됐다. 서광계가 사망한 후 260여 년이 지난 1896년, 이체(李杕)가 편찬한 《서문정공집》 4권이 단독으로 출간된 그의 최초의 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체는 진자룡의 선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 문집에 다만 27편의 글만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천주교 사탁(司鐸)이었던 그는 서광계의 과학, 역사상의 명성을 이용해 천주교를 선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과학에 관한 글보다 종교에 관한 글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있다. 1910년 서광계의 11대손인 서윤희(徐允希)는 《증정서문정공집》 5권을 편찬해 출간했는데, 이 문집에는 6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1933년에는 서광계 서거 300주년을 기념해 서종택(徐宗澤)이 서윤희의 문집을 바탕으로 89편으로 증보, 간행했다. 현존하는 가장 완정한 서광계 문집은 1962년 상해고적출판사에서 나온 《서광계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집에는 논문 204편과 시 14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문장의 종류, 시대 순서를 고려해 편집되어 있다.
서광계 문집에 수록된 글을 보면, 명청(明淸) 당시 일반적인 중국 문인들이 수많은 시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극소수의 시 작품만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그가 남긴 글 가운데 절반 정도는 주의류(奏議類)에 속하는 글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내용에서도 천주교와 관련된 글을 제외하면 천문, 역법, 수학, 측량, 군사, 농업, 수리 등 실용적인 학문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광계는 《기하학 원리》를 번역한 것을 비롯해 《측량법의》, 《간평의설》, 《태서수법》, 《농정전서》 등의 저서를 남겼고, 박해받는 서양 선교사들을 변호하는 <변학장소>, 황제에게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자는 상소문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이 책에는 이렇게 그가 직접 쓴 글 20편을 크게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수록했고, 집에 보낸 편지들을 수록해 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도 있게 했다. 서광계의 다양한 사상 및 학문적 관심과 성취를 보여 주고, 서광계라는 한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0자평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동양에 발을 들이며 동서양의 문명 교류가 촉진되던 시기, 서양의 학문과 기술, 종교 등에 큰 관심을 가진 동양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서광계다. 서광계가 쓴 글 20편을 발췌해 주제별로 나누어 수록했다. 수학, 천문학, 군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서광계의 학문적 식견과 사상, 그리고 그의 삶 속 이야기들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
지은이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명 왕조가 멸망을 앞둔 거의 마지막 세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17세기 전후는 인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동서양 문명의 본격적인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다. 가정제 말에 태어나 만력제와 천계제를 거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에 이르는 그의 짧지 않은 인생 역정은 당시를 살았던 한 전형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가 자선(子先), 호가 현호(玄扈)로, 남직례(南直隸) 상해현(上海縣)에서 태어났다. 만력 23년(1595), 나이 서른세 살 때 그는 광동 소주(韶州)에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처음 서양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마테오 리치가 출판한 세계지도인 《산해여지도》를 접하게 되었다. 만력 25년(1597) 향시(鄕試)에 합격한 그는 만력 28년(1600) 봄, 북경에 회시(會試)를 보러 가는 도중 남경에 들러 마테오 리치를 만났으며, 이후 그와의 교유가 시작되었다. 1603년 그는 남경으로 리치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대신, 선교사 로차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듬해 그는 마흔두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회시에 합격해 한림원서길사가 되었다. 만력제 말기 환관 위충현(魏忠賢) 무리의 전횡과 횡포 속에서도 그는 사직과 휴직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면서 그들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현명하게 피하며 적절히 처신했다. 그리고 결국 숭정제 때에 다시 발탁되어 재상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大學士)까지 올랐다.
서광계는 회시 합격 후 북경에 거주하게 되자 마테오 리치 등 서양 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천문, 역법, 수학, 수리, 측량 등에 관한 서양 학문을 탐구했다. 1607년 그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작업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를 번역한 것을 비롯해 《측량법의》, 《간평의설》, 《태서수법》, 《농정전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양 역법을 번역한 《숭정역서》는 1645년에 반포된 ‘시헌력(時憲曆)’의 토대가 되었는데, 이를 전체적으로 총괄 지휘한 것도 서광계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
이런 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업적을 고려해 볼 때, 그를 ‘근대 과학의 선구자’라 부르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공자(孔子)의 신봉자인 동시에 천주교도이기도 했으며, 동시대 그 누구보다 서양의 학술에 정통했던 인물이었다. 당시는 서양이 천문, 역법, 수학, 측량, 화약 무기 등의 분야에서 중국을 추월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서광계는 편견 없는 지적인 열정을 가지고 동서양 사유와 학술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열린 지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당시 서양 지식인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면, 동양 지식인을 대표할 수 있는 최초의 세계인은 바로 서광계였다고 할 수 있다.
옮긴이
최형섭은 서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급 진수 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서울대, 한양대, 가톨릭대, 인천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석사 학위논문은 〈풍몽룡(馮夢龍) 화본소설(話本小說) 연구〉이고, 박사 학위논문은 〈중국 소설을 통해 본 ‘개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사대기서(四大奇書)’부터 《홍루몽(紅樓夢)》까지의 변화를 중심으로〉다. 연구 논문으로 〈출판문화의 보급과 텍스트, 저자, 독자, 그리고 독서 관습−경전 읽기와 소설 읽기의 비교 분석을 통하여〉, 〈출판문화의 보급과 지식의 성격, 그리고 17세기 시사소설(時事小說)〉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서유기(西遊記)》(공역), 《무성희(無聲戱)》가 있다.
차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
《역서총목》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올린 글(曆書總目表)
《간평의설》 서문(簡平儀說序)
수학(數學)과 측량(測量), 수리(水利)
《기하원본》을 출판하면서 쓴 서문(刻幾何原本序)
《기하원본》 재교본에 쓴 제문(題幾何原本再校本)
《측량법의》에 쓴 제문(題測量法義)
《구고의》 서문(句股義序)
《구고의》 서언(句股義緖言)
《동문산지》를 출판하면서 쓴 서문(刻同文算指序)
《태서수법》 서문(泰西水法序)
군사(軍事)
숭정 2년 11월 4일 평대에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한 일을 기록함(記崇禎二年十一月初四日平臺召對事)
숭정 2년 11월 28일 평대에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한 일을 기록함(記崇禎二年十一月二十八日平臺召對事)
서양의 무기가 이미 그 효력을 보여 주었으니 충분히 활용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의 상소문(西洋神器旣見其益宜盡其用疏)
종교(宗敎)
변학장소(辨學章疏)
경교당비기(景敎堂碑記)
《이십오언》에 쓴 발문(跋二十五言)
가족과 일상(日常)
집에 보낸 편지 1(家書一)
집에 보낸 편지 7(家書七)
집에 보낸 편지 8(家書八)
집에 보낸 편지 11(家書十一)
서광계의 전기(傳記)와 생평(生平)
《명사(明史)》의 <서광계전(徐光啓傳)>
서광계 생평 연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
어리석은 제 생각에 특별히 뛰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종합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번역이 단서가 될 수 있으니 그러면 대통력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원리를 깊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원리를 자세히 연구, 고증해 그들 역법의 내용들을 대통력의 틀 속으로 흡수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집을 짓는 자가 법도와 치수는 하나하나 모두 전과 같이 하되 나무와 돌, 기와와 벽돌은 모두 가장 훌륭한 것으로 해야 하니, 그러면 천년만년이 지나도 반드시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바로 기존의 제도를 존중하면서 번역을 한다면 두 가지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 성스러운 왕조의 위대한 법도가 멀리 만왕에게 미쳐 영원토록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2.
작년에 보낸 편지와 올해 네 번째 이전의 편지는 모두 다 북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3월 이후의 것은 받지 못했다. 고향에서 괴이한 일이 많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특히 마음을 놓지 못하겠구나. 관청의 창고를 약탈했다는 사건은 사실인지 모르겠구나. 소주(蘇州)의 군영(軍營)에서 온 심부름꾼에 따르면 요(姚) 어르신 댁에서 그 얘기를 아주 상세히 하더라고 하던데, 다른 집들은 다 별다른 소식이 없으니 틀림없이 사실이 아닌 듯하다. 시대가 위태롭고 사건이 기이하니 그저 조용히 분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