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문화 시대, ‘우리/그들’의 경계를 재상상하라
예일대 정치철학 석학이 제언하는 대화적 다문화주의
2023년 12월 법무부가 공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의 수는 250만 명을 넘어선다. 총 인구 수의 4.89퍼센트에 이르는 규모로, 저출산 문제를 고려하면 그 비율은 앞으로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는 한 나라의 외국인 비율이 5퍼센트를 넘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로 정의하고 있다. 단일민족·단일문화로 오랜 기간 살아온 우리는 과연 다문화 사회에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채비가 되어 있을까?
세일라 벤하비브는 외국인, 이주민, 난민, 망명자 등 이른바 ‘이방인’ 문제에서 비롯하는 정치적·법적 쟁점에 천착해 온 정치철학자다. 한 사회의 문화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인 주류·선주 집단과 ‘그들’인 비주류·이주 집단의 경계가 형성·재구성·재협상되는 과정에서 계속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대화적·숙의적 절차를 바탕으로 문화 간 갈등과 충돌을 극복할 방법을 제시해 왔다. 이 책은 다문화 사회에 부합하는 문화 개념인 ‘비본질주의적 문화’부터, 문화 간 대화의 토대가 될 ‘숙의 민주적 모델’과 ‘민주적 반추’, 난민 문제와 직결되는 ‘보편적 환대권’과 ‘국경의 다공성’ 등 벤하비브의 사상을 구성하는 열 가지 키워드를 해설한다.
벤하비브의 다문화 연구는 21세기 초입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더욱 심화했다. 이는 경제 불황과 기후 위기 그리고 전쟁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이들의 수가 가파르게 늘어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이방인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이 환영받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동질화 경향이 심화하고 원리주의 관점이 득세하며 분리주의 양상이 격화하고 있다. 벤하비브의 다문화 연구는 우리 또한 앞으로 더욱더 자주 당면할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이에 책임 있게 임하는 데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 1950∼ )
현대 서구 사회의 정치철학 담론을 이끄는 미국 정치철학자다. 현재 예일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이자 컬럼비아로스쿨 연구학자와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태생이자 유대인 혈통으로서, 비서구 사회 속 유대계 여성 이방인이라는 다양하고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은 벤하비브의 학문 여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비판 이론과 페미니즘 철학을 바탕에 두고 문화 이론과 정체성 정치, 이주의 도덕성과 성원권 정치, 세계주의와 다문화주의 구상 등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 대표 저술로 ≪자아의 위치 짓기(Situating the Self)≫(1992), ≪문화의 주장(The Claims of Culture)≫(2002), ≪타자의 권리(The Rights of Others)≫(2004), ≪또 다른 세계주의(Another Cosmopolitanism)≫(2006) 등이 있다.
200자평
다문화 시대, 정체성 정치의 시대다. 문화 간, 정체성 간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다양성과 이질성이 환영받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동질화 경향이 심화하고 원리주의 관점이 득세하며 분리주의 양상이 격화하고 있다. 어떻게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그들’은 한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공존할 수 있을까.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적 인권,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간의 양립가능성을 모색하는 벤하비브의 구상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지은이
정채연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인문사회학부 대우부교수다. 고려대학교에서 법학사, 법학 석사,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대학교(NYU) 로스쿨에서 LL.M.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뉴욕주 변호사다.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미래전략대학원 연구조교수를 지냈다. 법철학, 법사회학, 법인류학 같은 학제 간 연구를 이론적 토양으로 해 법다원주의, 다문화주의, 관용 그리고 세계주의에 대한 기초법적 연구를 지속해 왔다. 최근에는 지능정보사회에서 인공지능과 지능로봇, 포스트휴먼, 블록체인 기술과 관련된 법이론적 쟁점에 주목하고 있다. 저서로 ≪코로나 시대의 법과 철학≫(공저, 2021), ≪법의 딜레마≫(공저, 2020), ≪법학에서 위험한 생각들≫(공저, 2018) 등이 있다.
차례
세일라 벤하비브의 정치철학
01 비본질주의적 문화
02 정체성 정치
03 절대적 상대주의
04 숙의 민주적 모델
05 세계주의
06 보편적 환대권
07 권리를 가질 권리
08 민주적 반추
09 국경의 다공성
10 시민권의 분해
책속으로
벤하비브는 문화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즉 문화가 그 대화성, 내러티브성 그리고 경쟁적 특성 때문에 내적으로 갈라지며, ‘우리’와 ‘그들’ 간 경계를 계속해서 형성·재구성·재협상한다고 본다. 벤하비브에 따르면 문화는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 작용과 경쟁적 관행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내적으로 완결된 문화란 존재할 수 없다.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 역시 내러티브 역량(narrative capacity)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내러티브 역량이란 자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변경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다.
_ “세일라 벤하비브의 정치철학” 중에서
복잡한 문화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절차에서 특정한 인종, 민족, 언어, 지역 등으로 한정되고 문화적으로 경계 지어진 우리와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연대의 공동체는 민족적으로 규정되거나 수립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와 그들 간의 경계가 특정 문화에 속한 구성원과 다른 문화권의 구성원을 구분 짓는 경계와 일치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이주의 시대에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에만 근거하는 구성원 자격(membership)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_ “02 정체성 정치” 중에서
다양한 문화 주장을 민주적 법치 국가에서 어떻게 수용할지의 문제를 숙의 민주적 모델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문화적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보편적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를 참여자로서 주체로 승인하는 것은 데모스와 시민권 문제와 깊숙이 관련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하비브는 현대 다문화주의 운동과 현상이 단일한 시민권과 주권에서 ‘유동적 시민권(flexible citizenship)’과 ‘흩어진 주권(dispersed sovereignty)’으로 나아가는, 더 거시적인 차원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이로써 문화 주장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세계 사회에서의 민주적 시민권에 대한 논의와 연결한다. 특히 벤하비브는 현대 유럽 사회에서 목격되는 시민권 제도의 변화 양상에 주목하면서, 유럽연합이라는 탈국가적 공동체로의 통합이 진행되는 동시에 새로운 경계 설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다양한 문화 주장들이 혼재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다문화 사회의 문화적 집단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그들을 구획하는 경계선은 탈국가적·국가적·지역적 지평에서 다층적으로 그일 수 있다.
_ “04 숙의 민주적 모델” 중에서
벤하비브는 세계인권선언이 국가 경계를 넘어서는 이동의 자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때 자신의 국가를 떠나 다른 국가로 이주할 권리(a right to emigrate)는 규정하고 있되(제13조) 다른 국가로 이주해 올 권리(a right to immigrate)는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곧 타국으로의 이주(emigration)와 타국으로부터의 이주(immigration) 사이에 분명한 비대칭성(asymmetry)이 존재한다. 또한 세계인권선언 제14조는 망명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고, 제15조는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국적을 변경할 권리를 부정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국경을 넘어서는(cross-border) 권리를 인정하지만, 이주자의 출입을 승인할 국가의 의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즉 이주할 권리에 관한 의무를 이행할 특정한 수신자(addressees)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_ “05 세계주의” 중에서
벤하비브에게 국경은 닫힌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열려 있는 것도 아닌, 투과될 수 있는(permeable) 다공성을 띤다. 국경이 다공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수신국의 국경에 도달하거나 이를 건너고자 할 때 망명을 비롯한 일련의 보호 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물론 우선 출입의 권리와 다공적 국경 개념은 합법적 난민과 불법적 체류자 문제 그리고 이들 중 누구에게 해당 국가의 성원권을 인정할 것인지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민주적 반추 개념에서 알 수 있듯 벤하비브는 이 문제를 대화 이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논하려 한다. 곧 벤하비브가 말하는 수용적이고 다공적인 국경은 성원과 비성원을 영토적 경계로 가르지 않고 성원권의 문제를 민주적 대화 절차로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_ “09 국경의 다공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