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현재까지 송욱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시의 경우 1950년대 작품들이 그의 문학 전반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다. 그 이후의 작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특히 서정적 시로의 전회가 심미주의로 인식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엇갈린다. 기실 송욱은 매우 폭넓은 역사의 격동기에 시를 창작했던 사람 중 하나다. 송욱은, 1950년의 6·25 전쟁과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 정변, 1972년 유신 정국까지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경험한다. 그는 전쟁과 전후의 파괴적인 삶을 목도하면서 문학 작품의 창작을 통해 현실 문제를 타파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1950년대의 시들이다. 전쟁과 전쟁 후의 상황에 대한 그의 시적 대응과 새로운 현실에 대한 계몽주의적 모색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실험과 상응하면서 당대 그 어떤 시인보다도 적극적으로 현실에 응전하고자 노력했다. 현실과 시의 상관관계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했던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이러한 적극적인 시 인식은 1960년대에는 4·19 혁명을 기점으로 관능적인 유미주의적 시세계로 전회한다. 이 역시 적극적인 현실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송욱은 현대에 대한 문명사적 비판 의식과 함께 서구적 근대로의 경사 등을 경계했다. 따라서 그의 시적 변화는 현실 인식의 소멸이 아닌, 서구적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적인 문학 이론의 모색 과정에서 비롯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여지향≫은 전후 현실에 대한 풍자를 통해, 현실의 비극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시적 의도를 지닌다. 이를 위해 그는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적 구도를 제시하고, 시 속에서는 이를 세속적인 육체 이미지와 신성한 육체 이미지의 대립으로 치환한다. 그는 세속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주로 ‘산송장’, ‘허깨비’ 혹은 불구적인 신체로 묘사한다. 불구의 육체는 전후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현실의 불완전성을 보여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순수한 육체는 세속성을 초월한 ‘바다’와 ‘알몸’의 이미지 등으로 구현되는데, 이는 주로 완전한 육체성으로서의 정신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제시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쟁을 불러일으킨 근대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폭넓게 자리한다.
200자평
전후 시대 초기의 문학가였던 송욱의 시를 모았다. 현실 인식과 풍자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 그를 전후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해 준 ≪何如之鄕≫의 초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인 송욱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지은이
송욱은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다.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942년 경기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鹿兒島) 제7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와 구마모토의과대학(態本醫科大學)을 다녔다. 해방 이후에는 1948년까지 서울대 영문학과에 편입해 수학했다. 6·25 전쟁 때에는 해군에 입대했으며,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박사 학위는 1972년에 서울대에서 받았다. 1954년부터 1980년 작고하기까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3년 한국출판문화상과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 6·25 전쟁 직전 ≪문예≫지 3월호와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단한다. 이때 발표된 작품이 <장미>, <비오는 창(窓)>이다. 그의 첫 시집인 ≪유혹≫(1954)은 고전주의적이고 이미지즘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이미지 위주의 심미주의적인 미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그의 전공인 영미문학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1950년대의 황폐한 전후 현실에 대한 실존주의적 자각 속에서 지적인 언어유희와 실험을 통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다수 발표한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한 응전의식을 드러낸다. 두 번째 시집 ≪하여지향≫(1961)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그의 시적 주제의식과 언어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본격적인 작품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후기 시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관능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시 세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 준 시집은 1971년에 발간된 ≪월정가≫가 대표적이다. 그 밖의 시집으로는 ≪나무는 즐겁다≫(1978)가 있으며, 유고 시집 ≪시신의 주소≫가 1981년 발간됐다.
한편 송욱은 시 창작과 더불어 문학이론가이자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비평 행위는 창작 행위와는 다른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전체 현대 문명과 근대 사상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그의 문학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구 모더니즘 문학과 사상에 대한 주체적 비판을 시도한다. 이러한 비평 행위는 ≪시학평전≫(1963)과 ≪문학평전≫(1969)에서 본격화되는데, 이미 이 시기부터 그는 동양과 서양의 문학 사상과 작품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동양 고유의 주체적인 문학 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러한 비평 행위는 만해 한용운의 시를 해석한 ≪님의 침묵 전편해설≫(1974)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이 밖에도 의미 있는 평론집으로 ≪문물의 타작≫(1978)이 있다.
엮은이
신진숙은 문학 평론가이자 문학 박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5년 ≪유심≫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송욱 문학의 근대성과 시적 주체의 변모 양상 고찰>(2005)이며, 평론집으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푸른사상, 2010)가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序言
卷頭詩-어머님께
薔薇
숲
꽃
窓
觀音像 앞에서
‘쥬리엣트’에게
‘햄릿트’의 노래
‘맥크베스’의 노래
誘惑
生生回轉
失辯
萬籟를 거느리는
詩人
時體圖
슬픈 새벽
王昭君
기름한 귀밑머리
출렁이는 물결을
살아가는 두 몸이라
겨울에 꽃이 온다
RIP VAN WINKLE
駱駝를 타고
거리에서
그냥 그렇게
서방님께
王族이 될까 보아
한 걸음 한 걸음이
拓殖 殖産 生殖을
‘永遠’이 깃들이는 바다는
壁
해는 눈처럼
南大門
洪水
義로운 靈魂 앞에서
어느 十字架
宇宙 家族
現代詩學
何如之鄕(壹∼拾貳)
壹
貳
參
四
五
六
七
八
九
拾
拾壹
拾貳
海印戀歌(壹∼拾)
壹
貳
參
四
五
六
七
八
九
拾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
솜덩이 같은 몸뚱아리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집을
달팽이처럼 지고,
먼동이 아니라 가까운 밤을
밤이 아니라 트는 싹을 기다리며,
아닌 것과 아닌 것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矛盾이 꿈틀대는
뱀을 밟고 섰다.
눈앞에서 또렷한 아기가 웃고,
뒤통수가 온통 피 먹은 白丁이라,
아우성치는 子宮에서 씨가 웃으면
亡種이 펼쳐 가는 萬物相이여!
아아 구슬을 굴리어라 琉璃房에서 —
輪轉機에 말리는 新聞紙처럼
內臟에 印刷되는 나날을 읽었지만,
그 房에서는 배만 있는 남자들이
그 房에서는 목이 없는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천장에 붙어 있고,
거미가 내려와서
계집과 술 사이를
돈처럼 뱅그르르
돌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좁아들다간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겠고,
안개 같은 地平線 뿐이리라.
창살 같은 갈비뼈를 뚫고 나와서
연꽃처럼 달처럼 아주 지기 전에,
염통이여! 네가 두르고 나온 탯줄에 꿰서,
마주치는 빛처럼
슬픔을 얼싸안는 슬픔을 따라,
비렁뱅이 봇짐 속에
더럽힌 신방 속에,
싸우다 祭祀하고
省墓하다 죽이다가
念念을 念珠처럼 묻어 놓아라.
“어서 갑시다”
매달린 명태들이 노발대발하여도,
목숨도 아닌 죽음도 아닌
頭痛과 腹痛 사일 오락가락하면서
귀머거리 運轉手 —
해마저 어느 새
검댕이 되었기로
구들장 밑이지만
꼼짝하면 自殺이다.
얼굴이 수수께끼처럼 굳어 가는데,
눈초리가 야속하게 빛나고 있다며는
솜덩이 같은
쇳덩이 같은
이 몸뚱아리며
게딱지 같은 집을
사람이 될 터이니
사람 살려라.
모두가 罪를 먹고 시치미를 떼는데,
개처럼 살아가니
사람 살려라.
허울이 좋고 붉은 두 볼로
鐵面皮를 脫皮하고
새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들창처럼 떨어져 닫히며는,
땅군처럼 뱀을 감고
來日이 登極한다.
-<何如之鄕 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