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671년 5월 24일, 3막으로 구성된 산문 희극 〈스카팽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가 처음 팔레 루아얄 무대에 올랐다. 코메디 발레 형식의 전작 〈프시케〉를 발표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로, 몰리에르는 공연과 집필을 병행하고 있어 늘 시간에 쫓기곤 했다. 더군다나 초연 당시 팔레 루아얄 극장은 한창 개보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작가는 제한된 무대 공간에서 손쉽게 극 행동을 펼칠 수 있는 단순한 작품을 구상해야 했다. 어렵사리 성사된 공연이었지만 성과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됐다. 초연치고는 흥행 수익이 매우 저조했고 작품성에 대해서도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공연은 다음 시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몰리에르는 타이틀 롤인 스카팽 역을 직접 연기했으며, 16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18회의 공연을 수행했다. 공교롭게도 작품은 그가 죽고 나서야 대중적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스카팽의 간계〉는 1673년부터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까지 40여 년 동안 197회 공연되었으니 1년에 평균 다섯 번 정도 관객과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이후 이 작품은 몰리에르 희극, 아니 프랑스 연극계에서 가장 자주 무대화되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희곡 출간은 초연이 있고 나서 약 3개월 뒤인 1671년 8월 18일 국왕의 후의에 힘입어 지체 없이 진행됐으며, 인쇄된 텍스트의 공식 제목은 ‘J.-B. P. 몰리에르의 희극 스카팽의 간계’였다.
스카팽은 완벽한 연극인의 표상이다. 스스로를 책략과 음모에 능한 일꾼으로 소개한 그는 갤리선 이야기를 고안해 내는 등 작가의 면모를 과시하는가 하면 젊음을 사색하는 현자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고 연출가로 행세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스카팽이라는 캐릭터는 희극 연기 계보에 두 흐름을 만들어 냈다. 정갈한 안무에 맞춰 무용수가 도약하듯 코믹 판타지에 입각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는 장루이 바로처럼 추론하고 사색하는 사람, 기교와 기지, 몽환적 특성으로 가득 찬 배우가 존재한다. 스카팽과 더불어 역시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차용한 캐릭터인 제르비네트도 주목할 만하다. 초연 무대에서는 마드무아젤 보발(Mademoiselle Beauval)이라 불린 잔 올리비에 부르기뇽이 이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대단한 희극적 능력을 가진 그녀는 특히 전염성 있는 웃음으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장점을 살려 〈부르주아 귀족〉의 니콜,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의 마르틴, 〈상상으로 앓는 환자〉에서 투아네트 등과 같은 쾌활하고 직선적인 성격을 지닌 하녀 역할을 탁월하게 연기해 낸 바 있다.
200자평
1671년 몰리에르가 천재적인 극작술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희극 전통을 재구성한 작품.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꾀바른 하인 스카팽의 계략 덕분에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에 성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은이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
실내장식업자인 아버지 장 포클랭과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인 어머니 마리 크레세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후 파리의 부유한 동네인 생토노레 거리의 파비용 데 생주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무렵 예수회 소속 명문 학교인 콜레주 드 클레르몽(Collège de Clermont, 지금의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귀족과 상류층 자제들만 입학이 허락된다는 이 학교에는 당시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가상디가 재직하고 있었으며, 장바티스트는 가상디의 문하에서 콩티 공, 프랑수아 베르니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43년 6월 30일, 장바티스트는 재능 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을 규합해 극단 ‘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 Théâtre, “유명 극단”이라는 뜻)’를 창단했다. 극단 출범 20개월 만에 파산한 몰리에르는 1645년 말 베자르 가족과 함께 유랑길에 올랐다. 파리를 떠나 지방을 유랑하던 몰리에르 극단은 파리로 귀환해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게 된다. 1662년 걸작 〈아내들의 학교〉를 발표했다. 여성 교육에 대한 비판 의식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반영한 이 정격 희극은 이례적인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격렬한 비판을 초래했다. 1663년 6월에 발표한 〈아내들의 학교 비판〉과 10월에 공연된 〈베르사유 즉흥극〉은 〈아내들의 학교〉 스캔들과 관련해 몰리에르 자신의 연극 세계를 피력하는 토론극 성격을 띠고 있다. 1664년 5월 당대 지배 계급과 종교인들의 위선을 고발한 문제작 〈타르튀프 혹은 위선자〉를 발표하면서 〈아내들의 학교〉를 능가하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련의 스캔들 이후 건강이 악화된 몰리에르는 1673년 2월 17일 〈상상으로 앓는 환자〉 네 번째 공연 도중 무대에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몰리에르 사후 그의 극단은 급격히 와해됐다. 대신 오텔 드 부르고뉴와 마레 극단의 배우들이 ‘왕의 극단’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아 그의 작품들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680년 국왕의 명령에 따라 파리의 극단들이 하나로 뭉쳐 몰리에르의 예술혼을 계승한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를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오늘날 프랑스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가 “몰리에르의 집”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다.
옮긴이
조태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앙토냉 아르토의 연극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객원교수를 거쳐 배재대학교 아트웹툰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 미국 루이지애나대학교(ULL) 커뮤니케이션학과 방문교수를 지냈다. 연극 이론 및 극작술, 공연 미학 관련한 논문과 칼럼을 여러 편 썼으며,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연극》(천재교과서, 2018)을 공동 집필했다. 《골고다의 딸들》(한웅출판, 1992), 《바람의 전쟁》(열린세상, 1996) 등의 번역 소설과 번역 희곡 《유령소나타》(지만지, 2014), 《바다에서 온 여인》(지만지, 2015), 《로칸디에라》(지만지, 201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지만지, 2018), 《헤다 가블레르》(지만지, 2018), 《건축가 솔네스》(지만지드라마, 2019), 《루나사에서 춤을》(지만지드라마, 2020), 《로스메르스홀름》(지만지드라마, 2020),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지만지드라마, 2021), 《들오리》(지만지드라마, 2022)를 펴냈다. 또한 공연 창작 현장에서 극작가 및 연출가, 드라마투르기로 활동하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다. 현재 극단 인공낙원 대표, 극단 하땅세 예술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창밖의 앵두꽃은 몇 번이나 피었는고〉, 〈3cm〉(지만지드라마, 2021), 〈푸른 개미가 꿈꾸는 곳〉 등이 있으며, 연극 〈유령소나타〉, 〈루나사에서 춤을〉, 〈목소리〉, 뮤지컬 〈포비든 플래닛〉, 〈애랑연가〉, 〈규방난장〉, 오페라 〈류퉁의 꿈〉 등을 연출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스카팽 : 사실 제가 일단 끼어들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죠. 온갖 지혜를 짜낸다든가, 남의 환심을 사는 일엔 제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든요. 뭘 모르는 저속한 인간들이 이를 간계라 부르죠. 전 저보다 더 책략과 음모에 능숙한 일꾼, 그리고 이 고귀한 일에서 저보다 더한 영광을 얻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