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리던 스페인이 마침내 2010년 월드컵을 거머쥐었다.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로 잘 알려진 스페인 축구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그동안 스페인 축구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좀처럼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의 하나로 ‘지역 갈등’을 꼽곤 했다. 어떻게 지역 갈등이 축구 성적과 관련이 있을까?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한 팀에서 뛰어 팀워크가 좋지 않다는 뜻인가? 그 정도로 이해해도 될까?
스페인은 세계적인 관광 대국답게 자신이 지닌 숱한 이미지로 전 세계인들을 매혹한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대체로 관광객들의 지갑과 관계가 있을 뿐 전체로서의 스페인을 보여 주지 못한다. 때문에 스페인을 알고 있는 이들조차도 ‘정열의 나라’라는 상투어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아무리 프리메라 리가가 인기 있더라도 축구 성적을 좌지우지할 만큼 뿌리 깊은 지역주의 전통이 설명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던 스페인의 황금기, 유수한 문학적 전통, 수많은 예술가들도 그저 파편으로서 기억될 따름이다.
이 책은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그저 이미지로서 소비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스페인 문학자의 노력에서 탄생했다. 저자인 전기순은 오랜 세월 동안 스페인 문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스페인어권 문화 전반에 걸쳐 관심을 기울이며 한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는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해 왔다. 스페인 문화와 역사 전반에 대한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제목이 말하듯이 이미지와 기억은 이 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이다. 기억, 즉 스페인의 역사는 독자들이 스페인을 이해할 수 있게끔 커다란 줄거리를 제공한다.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들부터 이슬람 문명과의 조우, 레콘키스타, 대항해시대, 스페인 내전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긴 역사를 치우치지 않고, 속도감 있게 조망하고 있다.
이미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를 뜻한다. 저자는 숱한 이미지들의 뿌리들을 찾아 가는데, 그것들이 역사와 만나 전체의 줄거리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된다. 투우나 플라멩코처럼 잘 알려진 스페인의 문화적 아이콘 외에도 다양한 식문화와 복권처럼 시시콜콜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페인적인 것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느껴진다. 특히 스페인의 세계적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대해서는 따로 장을 할애해서 애정의 편지를 띄울 정도다. 그리고 종교화를 위시한 스페인의 회화적 전통도 저자가 독자들을 위해 마련한 스페인의 이미지들인데, 스페인 문화의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듯 풍성한 이미지들을 제공하며 스페인의 역사라는 줄거리 위에 그것들을 배치해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스페인에 대한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책이다.
200자평
이제까지 알고 있던 “정열의 나라” 스페인은 잊어라.
그 참모습이 이미지와 기억을 통해 되살아난다.
투우, 플라멩코, 축구, 돈키호테, 무적함대, 벨라스케스, 산티아고 순례길, 알모도바르, 파에야… .스페인으로 가는 길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지만, 스페인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각각의 길들이 막힘없이 이어져야 비로소 전체로서의 스페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 진짜 스페인에 이르는 지도가 있다. 역사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 길에서 저 길로, 이베리아반도를 종횡무진 누비노라면 어느새 스페인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의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진짜 스페인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지은이
전기순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페인에서의 유학 생활은 텍스트로서의 스페인이 아니라, 뼈와 살을 지닌 진짜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뜨거운 태양과 메마르고 너른 대지를 지닌 스페인의 자연과 서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스페인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유학 시절의 개인적 체험과 감흥에 빚지고 있다. 스페인 내전 이후의 현대시에 대한 연구로 학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었고, 이후 스페인 시와 중남미 소설, 스페인어권 영화와 문화 등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문화 전반에 걸쳐 전방위적 관심을 쏟고 있다. ≪사랑에 대한 연구≫(풀빛, 2008), ≪돈 후안≫(을유, 2010), ≪사랑의 행진≫(박영률출판사, 2007)외 여러 권의 역서가 있고, 저서로는 ≪세계의 소설가≫(2000, 공저), ≪환멸의 세계와 매혹의 언어: 붐 이후 라틴아메리카소설≫(2005, 공저)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1부 이미지들
1장 이미지
황소 가죽
가톨릭 문화
스페인 가면 만나는 것들
플라멩코
2장 그림 이야기
알타미라와 엘체의 여신
성상화의 기호학
르네상스 화가들
엘그레코와 비잔틴적 환상
바로크의 거장들
벨라스케스와 공기의 재현
2부 기억
1장 문명의 충돌
로마로 가는 길
누만시아의 기억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기사 엘시드
안달루시아 이슬람: 코르도바 왕국
이븐 하즘과 ≪비둘기 목걸이≫
그라나다와 알람브라의 추억
2장 모험에서 환멸로
이사벨과 페르난도 그리고 1492년
콜럼버스의 이중성
가르실라소의 은밀한 매력
돈키호테와 돈후안
3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스페인과 EU
작은 나라들의 나라
알모도바르에게 보내는 편지
에필로그
찾아보기
책속으로
1.
스페인 국도에는 검은 황소들이 배회하고 있다. 이 황소는 거대하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투우는 두 발을 대지에 단단히 박고 도도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언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무척 다르다. 해 뜰 무렵에는 투우장에서 보는 바로 그 투우들처럼 도도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나른한 오후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있을 때는 마치 꿈결 속을 지나가는 듯 몽환적으로 보이고, 해 질 녘에는 반사되는 붉은 황혼 속에서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국도를 달릴 때는 프랑켄슈타인의 애완동물처럼 기괴하게 다가온다.
2.
강한 지역성은 때로는 스페인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을 국가성보다 더 강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국가적 민족주의와 지역적 민족주의가 별개로 존재하고. 후자가 더 강하게 나타날 경우가 많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파트리아 치카(patria chica)’, 즉 작은 국가라고 부른다. 파트리아 치카는 심리적 차원에서 국가라는 거대 구조에 비해 더 구체적이며 친밀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