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한국 독자들에게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 단편 〈첫사랑〉, 《사냥꾼의 수기》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희곡 역시 러시아 극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시골에서의 한 달〉(1850)은 가장 널리 연구되고 사랑받는 작품이다.
러시아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대학생 벨랴예프가 가정교사로 머무는 한 달 동안의 사랑과 갈등, 오해와 이별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 속 인물들은 지루하고 권태로운 시골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을 핑계 삼아 감정의 유희에 빠져든다. 그러나 끝내 누구도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 사실상 모두가 제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짝사랑의 연쇄 반응’ 속에 있다.
나탈리야는 젊은 가정교사 벨랴예프에게 연정을 품고, 그의 매력에 빠져든 양녀 베라와 미묘한 갈등을 벌인다. 나탈리야를 오랫동안 짝사랑한 라키틴은 그 옆을 지키지만 늘 소외감을 느끼고, 남편 이슬라예프는 이 모든 감정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점점 외곽으로 밀려난다. 투르게네프는 이 일련의 감정 소동을 진지한 비극이 아니라 ‘우스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단 4일간의 사건을 다루면서 ‘한 달’이라는 시간 배경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설정에는 시골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벨랴예프가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마치 밀폐된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화학반응처럼 인간관계를 실험하려는 투르게네프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변화하는 세대 감각과 지식인의 정체성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벨랴예프는 당시 ‘작은 인간’, 즉 하급 출신 지식인을 상징하며, 낡은 귀족 사회에 일시적이나마 변화를 몰고 오는 존재다. 그러나 “난 여기가 답답해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라는 그의 대사가 보여 주는 그는 다시 낡은 귀족 사회를 떠난다. 벨랴예프의 도착과 출발로 극이 시작되고 끝나는 구조는 작품을 유희적 소동으로 마무리 짓는 한편 이 드라마가 결국 현실의 변화라기보다 감정의 파문에 그친다는 점을 암시한다.
〈시골에서의 한 달〉은 투르게네프 자신의 연애 경험, 특히 유부녀인 오페라 가수 폴리나 비아르도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반영한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라키틴의 무기력한 짝사랑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읽히며 그로 인해 이 작품은 더욱 감정의 깊이를 획득한다.
최초 창작 후 여러 차례 검열과 수정 과정을 거친 이 희곡은 1855년 잡지 《동시대인》에 실렸으며, 무대 초연은 1872년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20세기 초 체호프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통해 다시 조명받으며 러시아 희곡의 또 다른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시골에서의 한 달〉은 단순한 삼각관계 연애극을 넘어, 현실과 욕망, 유희와 권태, 세대 간 인식의 간극을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투르게네프가 희극의 형식을 빌려 보여 준 이 ‘작은 드라마’는,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의 내면 풍경을 조용히 비춰 준다.
200자평
투르게네프의 희극 〈시골에서의 한 달〉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한적한 시골 귀족 저택에 젊은 가정교사 벨랴예프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감정의 유희를 그린다. 엇갈린 짝사랑과 오해로 가득한 이 드라마는 현실의 변화보다 감정의 소동에 가깝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은 체호프에 앞선 러시아 리얼리즘 희곡의 중요한 전범이다.
지은이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투르게네프(Ива́н С. Турге́нев, 1818–1883)
러시아 오룔에서 태어나,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냥꾼의 수기》, 〈첫사랑〉 등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작품은 개인 심리와 사회적 변화, 세대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점에서 주목받는다. 젊은 시절 독일 베를린에서 수학하며 서구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로 이행했다. 유럽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러시아 문학을 유럽에 알리는 가교 역할도 했다. 평생 유부녀였던 폴리나 비아르도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으며, 체호프에 앞서 사실주의 희곡의 가능성을 제시한 〈시골에서의 한 달〉 등의 희곡도 남겼다. 1883년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강수경
강수경은 러시아문학 연구자이다. 부산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 문학이론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학위 논문: 〈M.A. 불가코프의 서사작품과 극작품에 나타난 대화 연구〉). 2005년부터 부산대, 충북대, 경북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불가코프의 키예프 텍스트: ‘도시-키예프’와 “백위군”을 중심으로〉, 〈잡지 “독서를 위한 도서관”과 19세기 전반기 러시아 여성의 독서〉, 〈19세기 전반기 러시아 문학살롱과 여성의 문학〉 등이 있고, 역서로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펴낸 불가코프의 희곡 《백위군》, 테피의 희곡 《운명의 순간》, 《그런 일은 없어요》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 그래, 대체 이게 뭐지? 내가 베라를 질투하는 건가? 내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가? (잠시 침묵한 후) 그래 넌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넌 사랑에 빠진 거라고, 불행한 것!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마치 내게 독약을 먹인 것 같아… 갑자기 모든 게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린 것 같아… 그가 날 두려워한다… 모두가 날 두려워해. 나한테 있는 게 그에게 뭐겠어?… 그에게 나 같은 존재가 뭐람? 그는 젊고, 그녀도 젊어. 그런데 난!
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