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주고받은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은 것이다. 두 사람이 막 세상에 눈을 뜨던 1889년부터 시키가 사망하기 전해인 1901년까지 13년간의 교유의 기록이다. 나이로는 만 22세에서 35세, 이 기간에 시키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문업을 이루었으며, 소세키는 영문학자에서 장차 대문호로 우뚝 서게 되는 모든 역량을 싹틔우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왕복 서간 중 현존하는 것은 모두 84통으로, 시키가 보낸 것 21통, 소세키가 보낸 것 63통이 남아 있다. 서간은 출판 매체에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문학 작품과 달리 특정 개인에게 발신되는 사적인 기록이므로, 서간을 받은 당사자의 소유로 보존되거나 공개된다. 따라서 거의 전편이 남아 있는 소세키의 서간에 비해 시키의 서간이 소략한 것은 수신자인 소세키 측의 사정에 기인한다. 시키는 일찍이 정착해 거주지 이동이 적었으나 소세키는 졸업 후 마쓰야마(松山)와 구마모토(熊本)를 옮겨 다니며 교사 생활을 했고, 영국 유학까지 다녀오는 등 이주가 잦았던 탓에 보관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유실된 시키의 서간은 적어도 현존하는 양의 2배 이상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소세키의 서간을 통해 분명 존재했을 시키의 답신을 추측하는 것도 왕복 서간을 읽는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이 책에는 현존하는 시키의 서간 전체와 소세키의 서간 46편을 번역해 수록했다. 소세키의 서간 중에서 간단한 용무나 하이쿠 원고 전달을 목적으로 발신된 것들은 제외했으며, 대신 시키 사후 소세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글 2편을 추가했다.
200자평
일본 메이지 시대 시와 소설의 양대 산맥이었던 마사오카 시키와 나쓰메 소세키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았다. 두 위대한 작가가 막 세상에 발을 디딘 22세부터 시키가 사망하기 직전인 35세까지, 두 사람의 13년간의 삶과 고뇌를 민낯 그대로 볼 수 있다. 인간관계가 한없이 가벼워진 오늘날, ‘서간’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전하는 진정한 우정이 심금을 울린다.
지은이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1867년생 동갑이다. 소세키는 2월 9일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에서, 시키는 10월 14일 이요(伊予, 현재의 에히메 현)의 마쓰야마에서 태어났다. 이해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일본의 근대와 함께 탄생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며 일본의 근대 문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되는 두 사람이지만 이들의 삶은 전혀 다른 궤적을 보여 준다.
시키는 옛 마쓰야마 번(藩)의 무사였던 아버지 마사오카 쓰네히사(正岡常尚)와 어머니 야에(八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이 가장으로 집안을 일으켜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유학자였던 외조부 오하라 간잔(大原観山)에게서 한적과 서화를 익히면서 13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18세에는 와카를 익히기 시작했고, 20세에는 고향의 하이쿠 시인인 오하라 기주(大原其戎)를 스승으로 모셨다.
1889년 5월, 대량의 각혈을 경험하고 ‘시키’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시키의 문학은 결핵이라는 병과 함께 성장하고, 병고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은 대학을 중퇴하고 ≪니혼(日本)≫ 신문의 기자로서 본격적인 문예 활동을 시작하게 했으며, 나아가 하이쿠와 단카(短歌), 사생문(寫生文)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혁신에 착수하는 추동력이 되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고자 했으나 청일 전쟁 종군으로 악화된 병세는 서양 유학을 좌절시킨 대신 내부로부터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했다. 그의 혁신은 서양의 신문학이 아닌 스스로의 전통에서 문학의 표준을 찾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자신만의 눈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사생(寫生)’이라는 방법론을 열어 가게 된다.
그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마지막 6년간, 누운 채 집필한 수필과 평론들은 삶의 소중함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건강한 정신으로서 당대의 문인들을 병상에 불러 모았다. 그로부터 시작된 하이쿠와 단카 모임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와 ≪아라라기(アララギ)≫라는 일본 시가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이어졌다.
1902년 9월 19일, 35세를 일기로 영면하기까지, 병자의 감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섬세하면서도 천진한 수많은 하이쿠와 단카, 수필 ≪묵즙일적(墨汁一滴)≫, ≪병상육척(病床六尺)≫, ≪앙와만록(仰臥漫録)≫을 남겼다.
소세키는 나쓰메 고헤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신 직후 가세가 기울면서 늦둥이였던 소세키는 태어나자마자 두 번이나 양자로 보내졌다가 되돌아오는 파란을 겪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흥미를 두어 니쇼가쿠샤(二松学舍)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영어 교육 기관이었던 세이리쓰 가쿠샤(成立学舎)를 거쳐 17세에 도쿄대 예비 과정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영어의 수재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장래 진로로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다. 22세에 동급생 시키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하이쿠를 짓기 시작했고, 시키의 고향을 방문해 훗날 그를 직업 작가의 길로 인도한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03년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 강사로 재직하면서도 동양인으로서 영문학을 강의한다는 위화감에 힘겨워했는데, 그의 처녀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신경 쇠약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필한 것이다. 1907년부터는 대학 교수라는 최고 엘리트 신분을 박차고 ≪아사히(朝日) 신문≫의 전속 작가로 전향했다. 이후 10년간에 걸친 창작 활동을 통해 근대화의 모순, 근대 문명 속의 개인의 불안과 고독, 인간의 속물성과 에고이즘에 대한 탐구 등, 근본적인 고민을 이어 갔다.
근대 지식인 청년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모색을 그린 삼부작 ≪산시로≫, ≪문(門)≫, ≪그 후(それから)≫에 이어, ≪행인(行人)≫, ≪마음(こころ)≫의 대표작은 일관되게 개인의 내적 고뇌를 묘사한 것이다. 한편 근대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통과 탈속적 세계관으로 인생을 바라보고자 한 ≪풀베개(草枕)≫와 ≪열흘 밤의 꿈(夢十夜)≫, 만년의 자전적 소설 ≪길 위의 생(道草)≫ 등에 이르기까지,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휘몰아치는 시대에 태어나 근대의 빛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고뇌한 지식인으로서, 그의 소설은 그의 삶 자체였으며 나아가 일본 근대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 오랜 고투의 상징이기도 한 위궤양 악화로 1916년, 49세로 타계했다. 마지막 작품 ≪명암(明暗)≫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
옮긴이
박지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과 비교 문학을 전공했다. 석사 과정에서 처음 일본의 정형시 단카(短歌) 연구를 시작했으며, 단카와 근대 시조의 발전 과정을 비교한 ≪근대 한일 정형단시의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시형인 단카는 시조가 그러하듯이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장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삶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고 믿으며, 현재까지 단카를 통해 일본적 서정을 탐구하고 있다. 나아가 그것이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의 우리의 삶에 전해 주는 메시지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사오카 시키를 처음 만난 것은 단카가 고리타분한 구태를 벗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변모하던 19세기 말의 문학사를 뒤적이던 때였다. 막힘없는 기세로 혁신을 부르짖는 그가 반신불수의 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하나의 경이였으며, 빈사의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천진하고 건강한 그의 시들은 문학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후 그가 병상에서 태동시킨 근대 단카와 하이쿠의 양대 산맥을 따라오며 수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논문 <마사오카 시키와 선(禪)>, <요사노 덱캉(与謝野鐵幹)의 단카 혁신과 조선>, <늙음의 시학−사이토 모키치(斎藤茂吉)의 ≪달그림자≫론>, <동일본 대진재와 단카−아사히 가단의 육성의 기록> 등과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의 단카집을 번역한 ≪헝클어진 머리칼≫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차례
1889년−22세
1890년−23세
1891년−24세
1892년−25세
1893년−26세
1894년−27세
1895년−28세
1896년−29세
1897년−30세
1898년−31세
1899년−32세
1900년−33세
1901년−34세
1902년−35세 이후, 소세키의 회상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애첩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썰렁한 주머니와 야윈 지갑 사정에도 거금 2전의 낭비를 개의치 않고 시코쿠 구석까지 옥찰을 내리시는 이 친절. 필시 감격의 눈물에 젖어 이 낭군의 대자대비함을 감사히 여기시리라, 본의 아니게 생색을 내며 급보를 전하오.
일전의 편지로 의뢰하신 점수 목록은 그만하면 알았으니 일일이 말하지 않으셔도 되오. 만사 내 생각 속에 있으니, 우선 에돗코가 하는 것을 보시게나. 할 일 없는 사람이 고맙게도 갑자기 볼일이 생기니 기뻐하며 당장 비술을 써서 구메 선인을 생포했으니 우선은 안심했지. 그래도 총포로 생긴 굳은살(쓸렸다기보다 허물을 벗은 것에 가까움)에 손 거죽 두껍기가 한 척이나 된다는 시골뜨기 병사를 상대로 한 이런 담판은 부드러운 풍류남으로 이름 높은 나로서는 도저히 무리가 아닌가. 물러나겠다고 뻣뻣하게 거절할 판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참, 어쩌랴. 자네, 아니 애첩을 위해서는 목숨에 여벌만 있다면 둘이든 셋이든 바쳐도 좋다고 할 만큼 친절한 이 몸인지라,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고금 미증유의 용기를 고무해 두세 번의 전쟁을 치른 결과, 무운이 돌보시어 승리하게 되었소. 규수의 몸은 1부 2학년 3반 교실을 종횡무진 마음대로 활보하시게 되었다오.
분명,
“어머나, 믿음직스럽기도 하셔라. 긴 님은 추남인 얼굴과는 안 어울리게 내실 있는 사람이시군요.”
라고 하시리라 생각되어 이 몸의 고명한 공적을 대서특필해 선전하니 대략 이와 같소.
낭군으로부터
−이 편지 도착 무렵에는 분명 상경 중이겠지. 만약 여전히 우물쭈물 고향에 눌러붙어 있다면 이 글을 보는 대로 뛰어나와 도쿄로 출발해야 할 것일세.
* 이해 9월 소세키와 시키는 함께 제1고등중학교 본과 2학년으로 진급했다. 시험 점수가 모자랐던 시키를 위해 소세키가 분주히 노력한 경위를 마치 애첩을 위한 낭군의 마음인 듯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