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기괴한 것은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18세기까지 영국 독자들에게 익숙했던 소설은 존 버니언을 비롯해서 대니얼 디포,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 등의 소설, 즉 주인공의 일생 또는 일생의 어느 기간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알기 쉽게 서술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그 틀을 깨고 글쓰기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작가가 로런스 스턴이다.
그는 언어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과감하게 독창적으로 실행했다. 작중 화자 트리스트럼은 일찍이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생애와 견해≫(이하 ≪트리스트럼 섄디≫) 초반부터 가지치기 수법을 이 작품 구성의 원리로 선언한다. 그에 따라 이야기는 본줄기에서 수시로 벗어나고 시간은 뒤섞인다. 자신의 수태 이야기부터 작품을 시작하고 나서 슬그머니 산파 이야기로 화제를 바꾼 다음, 곧이어 헌정사를 쓰고, 그다음에는 자신의 부모의 결혼 계약서를 보여 주고, 소르본 학자들에게 보내는 질의서와 답신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대고모 디아나 이야기로 빗나가는 등 이야기 본줄기에서 한참 벗어난 다음, 마침내 자신은 차라리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겠다고 하는 식이다. 스턴의 글에서 또 한 가지 특히 두드러진 점은 온갖 시각적 수단을 동원한 보여 주기 방법이다. 그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언어의 불완전성을 시각적인 표현으로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작중 등장인물에 대한 애도는 한 쪽을 가득 채운 검은 상자로 표현하고, 막대기를 휘두를 때는 막대기의 궤적을 그림으로 나타낸다. 이 외에도 수많은 별표(*)와 대시(―), 독자 모르게 누락한 열 페이지짜리 한 장(chapter), 독자더러 그림을 그려 넣으라고 하는 빈 페이지까지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짐작대로 당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외면 아니면 혹평이었다. 당대 영국 문단의 거물이었던 새뮤얼 존슨은, “기괴한 것은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트리스트럼 섄디≫가 그 예”라고까지 했다.
20세기 들어 그의 작품을 알아보는 이들이 나타난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논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찌 로런스 스턴 같은 작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를 가리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고 하고, 그에 비하면 모든 다른 작가들은 “경직되고 고지식하고 편협하고 촌스럽게 직설적”이라고 한다. 그는 이어서 “[스턴의 작품에서는] 고정된 형체는 끊임없이 깨지고, 대치되고, 변형되어 불명확한 것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고 그러므로 그를 “모호성(ambiguity)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평생 스턴에 감탄한 괴테는 만년(1828년)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쓴 글에서, 자신은 셰익스피어와 스턴과 골드스미스에게 무한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1년 후에도 그는, 자신이 문학도로서 성장하려던 중요한 시기에, 골드스미스와 스턴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또, 스턴은 18세기 후반에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고결한 아량과 온후한 사랑의 위대한 시대를 열고 가꾼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작품의 최고 권위자라 할 수 있는 김성균 교수의 노작이다. 필자는 국내에 이 작품의 연구가 전무하던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1979년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이후에도 강의에서 꾸준히 읽다 2000년 초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던 이 작품의 번역에 착수했다. 2003년 1차 탈고 후 퇴고를 거듭했고 지난한 편집 과정까지 거쳐 2020년 출간의 결실을 맺었다. 번역에는 작품의 결정판으로 공인되는 뉴(Melvyn New and Joan New)의 판본을 사용했고, 주석은 트리스트럼 연구의 선구자인 제임스 워크(James A. Work)의 각주를 기본으로, 뉴·와트·앤더슨·로스 등 기존 연구자들의 판본을 두루 참고했다. 또 시각적 효과에 민감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 이번 번역본에서는, 의도되었지만 간과하기 쉬운 언어 외적 다양한 시각적 수법(typography)을 구현하는 데 신경을 썼다. 말로만 설명을 들어서는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스목잭, 샅주머니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참고그림을 통해 알 수 있고, 1358개에 달하는 각주, 참고 문헌, 60여 쪽의 상세한 해설과 지은이 소개 등은 연구자들의 참고자료로 손색이 없다.
200자평
세기를 앞서간 작가 로런스 스턴의 대표작.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주인공의 연대기여야 했던 시대에 스턴은 언어의 한계성을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에 파격을 기한다. 본줄기에서 수시로 뻗어나갔다 돌아오는 곁가지 스토리텔링이며,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의 활용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의 과감한 실험이었다. 니체는 그를 가리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작가”라 했고, 괴테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은 작가로 그를 꼽는다. 이번 번역본은 작품의 결정판으로 공인되는 뉴(Melvyn New and Joan New)의 판본을 원전으로 사용했고, 트리스트럼 연구의 선구자인 제임스 워크(James A. Work)를 비롯해, 뉴·와트·앤더슨·로스 등 기존 연구자들의 각주를 두루 참고했다. 또 시각적 효과에 민감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 의도되었지만 간과하기 쉬운 언어 외적 다양한 시각적 수법을 구현하는 데 신경을 썼다.
지은이
로런스 스턴은 1713년 아일랜드 남부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요크 대성당의 대주교였으며 큰아버지는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요크에서 상류층으로 살았고, 수완 좋은 작은아버지는 요크 대성당의 대주교와 친밀한 관계로 교회 고위직에 있었다. 부모를 따라 요크셔주, 더블린, 또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군부대를 전전하면서 지냈으며 10세 정도 되었을 때 요크셔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세(173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Jesus College)에 입학해서 근로 장학생으로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폐결핵을 심하게 앓고 지냈다. 1737년 학사학위를 받고 성공회 집사 자격을 얻어 케임브리지에서 가까운 성당에서 말단 목사보로 일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1738년 2월에는 종교계와 정계에 영향력이 컸던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영국국교 교구목사가 되어 목사직을 얻었다. 1741년 엘리자베스 럼리와 결혼했다.
정치 논설, 설교 원고 등을 쓰다가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생애와 견해≫ 1, 2권의 성공으로 무명의 한 시골 목사에서 단번에 온 유럽에 알려진 명사가 되었다. ≪요릭 씨의 설교집≫, ≪센티멘털 저니≫ 등의 작품을 남기고 1768년 사망했다.
옮긴이
김성균은 서울에서 태어나 1958년에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서 1964년에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부터 연세대학교에 재직했다. 1982년에는 하버드ᐨ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방문 교수로 18세기 영국 소설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2004년 봄 퇴임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18·19세기 영국 소설을 강의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다. 석사 학위 논문은 <그레엄 그린의 소설 연구>(연세대, 1966)이고, 박사 학위 논문은 <≪트리스트럼 섄디≫ 연구: 작가의 독자 의식과 소설의 구성>(연세대, 1979)이다. 영국 소설 발생기의 여러 작가인 존 버니언, 애프러 벤, 대니얼 디포, 엘리자 헤이우드,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 로런스 스턴 등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95년에는 미국에서 출판되는 영문학 연구 정기 간행물 ≪18세기 픽션(Eighteenth Century Fiction)≫(제8권 제1호, pp.95∼142)에 실린 극동 아시아 4개국에서의 디포 연구 논문 목록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18세기 영소설 주석본으로 대니얼 디포의 ≪몰 플랜더스≫(신아사, 1991), 헨리 필딩의 ≪조지프 앤드루스≫(연세대출판부, 1995), 새뮤얼 리처드슨의 ≪패멀라≫(연세대출판부, 1996)를 냈고, 학부 영산문 강독 수업을 위한 주석본 ≪Prose in English≫(연세대출판부, 1998)를 편집했다.
역서로는 그레엄 그린의 ≪명예영사≫(한길사, 1983)와 새뮤얼 리처드슨의 ≪클러리사 할로≫ 전 8권(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제7회 유영번역상 수상), 헨리 필딩의 ≪조지프 앤드루스/섀멀라≫(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대니얼 디포의 ≪행운의 여인 록새너≫(지식을만드는지식, 2015)가 있다.
차례
원전 소개
1.
제1권
제2권
제3권
제4권
2.
제5권
제6권
제7권
제8권
제9권
부록
인물 색인
각 장 내용 요약
주요 사건 연표
참고 그림
참고 문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곁가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햇빛 자체와 같다. 이들은 독서의 생명이며 영혼이다. 이 책에서 이것들을 제거할 생각이 들면 차라리 책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춥고 긴 겨울만 깃들게 된다. 이제 곁가지들을 작가에게 다시 줘 보자. 그러면 작가는 잔치를 치르는 신랑처럼 당당히 걸어 나와,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면서, 음식 맛에 변화를 주고 구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애쓸 것이다.
-135쪽
“그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나와 상관없네. 그놈이 나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데려가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나는 아직도 40권을 더 써야 하고, 내가 앞으로 글을 쓰고 해야 할 일이 4만 가지나 되니 말일세. 나 대신 글을 쓰고 일을 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자네 말고는 아무도 없네. 그런데 자네가 보다시피 그놈이 지금 내 목을 움켜쥐고 있어서(유지니어스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내 목소리는 그에게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평지에서는 놈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네. 나의 사기가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 있고, 나의 이 거미같이 앙상한 다리가 그래도 지금은 내 몸을 지탱해 주니 말일세(나는 내 다리를 들어 그에게 보였다). 유지니어스, 나는 그놈으로부터 줄행랑쳐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바로 내가 자네한테 권하고 싶은 걸세, 친애하는 나의 벗이여,” 하고 유지니어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대답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그놈이 상상도 못 해 본 험한 곳으로 달아나, 그놈이 나를 따라오느라 죽도록 고생하게 만들어 주겠네.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서 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가론강까지 갈 걸세. 그래도 그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내 뒤를 바짝 따라오면 나는 베수비오산으로 줄달음치겠네. ―― 거기서 다시 요파로, 요파에서 땅끝까지. 그래도 또 쫓아오면, 나는 하느님에게 ‘그놈 목을 부러뜨려 주소서,’ 하고 기도하겠네.” ――
-933~934쪽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고, 내가 지금 써 내려가는 글자 하나하나는 나의 남은 생명이 나의 빠른 펜을 쫓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소. 내 사랑 제니여, 나의 생명은 그대 목에 걸린 루비보다도 더욱더 소중한데, 이것이 연장되는 매일 매시간은 바람 부는 날의 가벼운 구름처럼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오 —— 모든 것이 바삐 사라지고 있소 —— 그대가 머리채를 매만지고 있는 짧은 순간에도 —— 봐요! 흰머리로 변하고 있지요? 내가 그대의 손에 키스하면서 ‘아디외’ 하고 말하는 모든 순간,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그대 없는 순간들은 우리가 곧 시작하려는 영원한 작별의 전주곡이오. ——”
-1208~1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