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단재 신채호의 사상적 궤적은 한 가지로 명명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주체적 민족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정립을 강조한 역사학자이면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 잡지 등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정론을 펼친 언론인이고,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작품을 쓴 문인이기도 했다. 또한 신민회, 상해 임시 정부 등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면서,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이처럼 신채호의 삶과 사상적 흐름은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은 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 주체의 정립을 위한 시대와 역사의 소명에 따르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 결과 그의 말과 글은 언제나 주저 없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술은 여느 지식인들의 탁상공론과는 다르게 과감한 실천을 요구하는 촌철살인의 언어로 빛을 발했다. 따라서 신채호의 사상과 글쓰기를 ‘수필’이라는 장르적 범주 안에 국한해서 논의를 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저술 가운데 역사와 전기를 다룬 글을 제외하고라도 신문, 잡지에 발표된 논설 등은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역사적 안목과 비판적 세계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식으로 정의되는 수필의 세계를 뛰어넘어 모순된 역사에 맞서는 저항적 지식인의 정론이라는 점에서 엄숙하고 강한 어조로 일관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글쓰기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민족 구성원들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한글, 소설, 종교 등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서 그의 산문 전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구체화한 글쓰기의 양상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애국 계몽주의자로서 자주적 근대화론에 입각한 글, 민족주의자로서의 민족 해방 운동을 천명한 글,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과 관련한 글이다. 그는 계몽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변신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와 시대를 정확하게 읽어 내고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던 지사적 결기에서 비롯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역사와 이념이 고루한 지식의 영역에 갇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탁상공론식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현실 타협론자들의 안이한 현실 인식에 대해서도 무엇보다도 단호했다. 이 때문에 그가 참여했던 여러 단체나 조직에서 중심에 있지 못하고 늘 비판적 아웃사이더로 살아야만 했다. 그에게 실천이 결여된 이념은 한낱 관념일 뿐이었고, 직접적 독립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실력 양성은 허울 좋은 이상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상 어느 한 곳에 절대 머무르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이러한 자유는 일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으며, 민족정신을 올곧게 세우려는 의지적 선택이었다. 그의 글쓰기가 애국 계몽에서 민족주의로 그리고 아나키즘으로 진화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궤적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200자평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의 수필을 모았다. 그의 산문은 역사와 민족, 주체를 키워드로 자주적 근대화와 민족 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삼은 정론 직필의 언어적 실천이다.
지은이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처음에는 채호(寀浩)로 표기하다가 뒤에 채호(采浩)로 변경했고, 아호는 정몽주 <단심가>의 영향을 받아 ‘일편단생(一片丹生)’으로 했다가 이를 줄여 단재(丹齋)라고 했다. 어린 시절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명민했는데, 14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해 인근 마을에까지 문명(文名)을 날렸다. 1895년 풍영 조씨와 결혼했고, 1896년 신승구와 신병휴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1897년 할아버지는 신채호의 배움을 더욱 확장해 주기 위해 신기선에게 소개했는데, 그의 서재에서 개화 서적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듬해 신기선은 신채호의 능력을 인정해 성균관에 추천했는데, 변영만, 조소앙 등과 함께 이남규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해 11월 독립협회에 참가해 투옥당했고, 이때부터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는데, 1901년에는 신규식과 함께 문동학원을 설립했다. 1905년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날 이를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가 묵정리에서 신백우, 신규식과 더불어 산동학원을 개설했다. 그해 장지연은 신채호를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했고, 이후 줄곧 언론을 통한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1906년 ≪황성신문≫ 폐간 이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가정 교육과 여성 계몽을 위해 순 한글로 발간한 ≪가정잡지≫에 주필로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다. 1911년 독립군 및 무관학교 창설 계획이 자금문제로 실패하자 이갑, 이동휘, 윤세복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청년권업회 기관지 ≪대양보≫의 주필을 맡았다. 1913년 러시아를 떠나 중국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참여해 활동했다. 1914년 독립군 양성소 기지를 위해 남북 만주 일대와 한국 고대사 관련 유적지를 답사했다.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보타암에서 ≪조선사≫ 집필을 하면서 ≪중화보≫, ≪북경일보≫ 등 중국의 유수한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1919년 만주 길림의 대한의군부 주도의 <대한 독립 선언서>에 참여했고, 1921년에는 ≪천고≫를 간행했다. 1922년 새로운 임시 정부 구성과 독립 노선을 위해 국민 대표회의 개최에 전력을 다했고,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이동해 <조선 혁명 선언서>를 집필했다. 1927년 홍명희의 요청으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8년 유맹원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을 거쳐 대만에 상륙 직전, 일경에 체포되어 중국 다롄으로 호송되었다. 1930년 다롄 감옥 독방에 수감되었고, 1935년 건강 악화로 보석이 결정되었으나 친일파의 보증으로 출감을 할 수는 없다고 해서 거부했다.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의식 불명 상태가 되었고, 21일 오후 4시 20분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23일 뤼순에서 화장하고 24일 유해를 서울로 이송해 25일 귀래리 고두미 옛 집터에 안장했다.
엮은이
하상일은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오늘의 문예 비평≫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평론집으로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2002), ≪주변인의 삶과 시≫(2005), ≪전망과 성찰≫(2005),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2008), ≪생산과 소통의 시대를 위하여≫(2009), ≪리얼리즘‘들’의 혼란을 넘어서≫(2011)가 있고, 연구서로 ≪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 비평과 매체의 비평 전략≫(2008), ≪한국 문학과 역사의 그늘≫(2009),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역사적 이해≫(2011)가 있으며, 인문 여행서로 ≪상하이 노스탤지어≫(2016)가 있다. 공저로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한국 문학 권력의 계보≫, ≪비평, 90년대 문학을 묻다≫,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강경애, 시대와 문학≫, ≪2000년대 한국 문학의 징후들≫,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 ≪김현 신화 다시 읽기≫ 등이 있고, 편저로는 ≪고석규 시선≫, ≪최일수 평론선집≫, ≪조동일 평론선집≫, 공동 편저로 ≪고석규 문학의 재조명≫, ≪소설 이천년대≫, ≪일제 말기 문인들의 만주 체험≫, ≪영구 혁명의 문학‘들’≫ 등이 있다. ≪오늘의 문예 비평≫ 편집주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작가와 사회≫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2014년 2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중국 상하이 상해상학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동의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고석규비평문학상(2003), 애지문학상(2007), 설송문학상(2014)을 수상했다.
차례
大韓의 希望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續)
大我와 小我
文法을 宜統一
浪客의 新年 漫筆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선언
국한문의 경즁
오날 대한국민의 목뎍디
근일 국문 쇼셜을 져슐 쟈의 주의 일
한국과 만쥬
가족 샹을 타파
동양쥬의에 평론
한국과 일본을 합병 의론을 쟈에게 고노라
문화와 무력
뎨국쥬의와 민족쥬의
만쥬와 일본
이십셰긔 국민
일본의 큰 츙노 세 사
유교 동포에게 경고
승려 동포에게 권고
愛國 二 字 仇視 敎育家여
엇던 거시 츙신이라 을 의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四十 以上은 다 죽이여야 되겟다”는 소리가 新靑年의 입에 올으나린 지 오래이다 멧 마듸 條理 업는 演說로 一時에 先生의 尊稱을 어든 二十 年 前의 舊靑年 四十 以上들은 마치 價値 업는 物件이 意外의 時勢로 暴騰하다가 그 時勢가 지나가면 다시 暴落하듯시 아조 時勢를 일코 죽은 사람들이니 더 죽일 것도 업거니와 三十 以下의 新靑年들은 산 것이 무엇이냐? 過去를 否認하지만 玉塔도 부시며 寶塔도 부시여라 하는 露國 虛無黨 時代의 否認이 아니라 다만 消極的 否認이며 時代에 落伍者가 되지 말자 불우지짓만 熱血과 勇氣가 업슴으로 다만 時代에 阿容하는 奴隸가 될 이며 西間島의 十萬 名 養兵과 美國의 一億萬 元 借欵을 壯談하던 舊靑年의 誇大妄想도 밉지만 二三百 名 留學生의 社會에서 每朔 三四 元의 費用을 듸리어 刋行하는 十餘 張의 速刷版 雜誌는 더욱 可憐하며 新舊 書籍 間 一 卷의 冊子도 보지 안코 다만 禮拜堂의 讚美와 무쇠 주먹 돌 근육의 狂歌로 生活하던 舊靑年의 擧動도 讚許할 수 업지만 政治的 經濟的 現實의 苦痛에서 逃脫하야 新詩 新小說의 避亂 生涯로 一生을 마주랴는 新靑年의 心理야 참말 哀惜할 만하다 이 가튼 頹敗한 志氣로는 設或 學業을 成就할지라도 學校의 敎師가 되거나 或 外國人의 會社의 職員이나 되야 自己의 糊口나 할 이오 設或 海軍 陸軍 飛行隊의 將校가 될지라도 그 所得의 月俸으로써 自家의 温飽나 經營하며 貧窮의 同胞나 傲視하리니 업는 者의 知識이 쓸데 잇스랴 마치 閔泳徽의 金錢이 公共 運動에 쓸데업슴과 一般일 것이다 아아 크로포트킨의 ≪靑年에게 告하노라≫란 論文의 洗禮를 밧자 이 글이 가장 病에 맛는 藥方이 될가 한다
<浪客의 新年 漫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