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주인공 정우가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은 인물이라면, 고문을 당한 뒤 정우를 주동자로 밀고하고 동료들에게는 밀고자로 다시 광식을 지목한 현이와, 정우의 신념에 동조하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이와 결혼함으로써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광식은 허위의식과 양면성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현이와 광식은 정우가 실종된 것과 달리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모멸감을 느끼고 정우에게 죄책감을 가진다. <실비명>은 현이의 집과 과거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 인물들이 내면을 표출하는 공간으로 무대를 분할하고 환상적인 음악과 조명, 그림자를 활용해 등장인물의 현재와 과거를 대비한다. 이는 과거 사건 때문에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또한 사라진 정우를 찾는 정우의 어머니 순영과 현이의 어머니 은옥을 통해 하층민 여성과 중산층 여성들이 겪는 삶과 회한을 다루는 동시에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그려 냈다. 순영은 아들 정우가 실종된 연유를 밝히기 위해 현이의 집에 방문하지만, 은옥은 이를 냉담하게 거절하며 정우와 현이를 연결 짓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며 점차 정우와 광식이 가졌던 고뇌, 고문 이후 신념을 저버리고 연인을 밀고했다는 죄책감에 미쳐 가는 현이의 모습이 그려지며 마침내 두 여인은 시대의 희생양이 된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화해하게 된다.
200자평
노동운동에 투신한 정우과 그의 연인 현이, 현이의 정혼자이자 정우의 이웃 형인 광식을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의문사와 성고문 등 1980년대에 있었던 민감한 문제를 상징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지은이
정복근은 1946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 혼자서 습작을 하다가 1974년 극단 가교의 이승규 대표를 만나 가교의 극본 작가로 기용되었다.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여우>로 등단했으며, 이후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실비명>으로 1989년 제13회 서울연극제 대상과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이런 노래>로 1994년 제18회 서울연극제 희곡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에는 <위기의 여자>, <웬일이세요, 당신?>, <덕혜옹주>, <나, 김수임>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실비명
<실비명>은
정복근은
책속으로
현이: (뿌리치고 돌아서며 속삭이듯) 그날 밤 옆방에서 네 소리가 들렸어. 네 비명 소리인 줄 금방 알았어. 무슨 짓을 당하는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감방으로 돌아와서는 옆집에 사는 광식 씨가 밀고했다고 말해 버렸어. 학교 선후배들 사이에서 광식 씨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 다 알았지만 괴로워서 그렇게 말해 버렸어. 정우, 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난 다 알아. 나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난 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