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카프카의 고독 3부작 ≪실종자≫≪소송≫≪성≫
카프카는 장편소설을 단 세 편 남겼다. 세 편은 ‘인간들 사이의 낯섦, 고립’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그중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인 ≪실종자≫는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카프카를 그토록 인상적으로 만드는 특유의 어두운 환상성과 그로테스크적 성격이 덜해서, 카프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사실주의적이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실종자≫ 속에는 카프카 문학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 권력과 지배의 문제, 기계화되고 관료화되어 가는 세계와 인간 소외의 문제 등등. 이러한 주제는 ≪실종자≫에서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고 이 주제들을 드러내기 위해 카프카는 그로테스크하게 왜곡되고 과장된 비현실적인 세계를 빚어냈다.
현대인의 삶에 대한 놀라운 예언
≪실종자≫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소년의 섬뜩한 이야기다. 열일곱 살의 카를 로스만은 고향 프라하에서 서른다섯 살 하녀의 유혹에 넘어간다. 그 결과 아이가 태어나고 카를의 부모는 양육비 부담과 자신들에게 밀어닥칠 추문을 피하기 위해 카를을 배에 태워 미국으로 보낸다. 소년 카를은 착취와 경쟁이 난무하고 비인간화된 세계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지만 철저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위계질서의 권위와 카를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추방이라는 구도는 작품에서 계속 변주된다. 그리고 마지막, 카를은 오클라하마 극장에 채용된 사람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하는 도중에 실종된다. 실존의 전제 조건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지만 ‘실종’을 통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처벌의 공간에서 해방된 카를. 이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순응하고 스스로를 순치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놀라운 예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메리카’와 ‘실종자’
이 소설은 처음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1927년 카프카의 친구이자 평론가·편집자인 막스 브로트가 미완성인 이 작품의 제목을 그렇게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가 1912년 한 편지에서 “미완성으로 구상 중인 이야기”라고 하며 언급한 제목은 바로 ‘실종자’다.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카프카는 세상을 떴고 브로트는 그 원고를 편집해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982년 문제를 의식한 연구자들이 비평판 카프카 전집을 발간하기 시작한다. ‘실종자’는 그렇게 제목을 되찾았다.
200자평
카프카가 남긴 장편소설은 고작 3편이다. 고독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실종자≫≪소송≫≪성≫. 그중 첫 작품인 ≪실종자≫는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실종자≫ 속에는 카프카 문학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은 한국카프카학회 회장과 자문위원을 역임한, 카프카 연구의 권위자 편영수 필자가 번역하고, 소설의 창작 과정, 작품 해석, 판본 설명 등을 포함한 해설, 지은이 소개와 연보, 서울대 김태환 교수의 서평 등이 실린 ≪실종자≫의 결정판이다. 미국 화가 에믈렌 에팅(Emlen Etting)의 그림이 함께 실렸다.
지은이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출신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 상인 가문의 아들로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독일계 초등학교, 김나지움을 거쳐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했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7년 걸린 폐결핵이 악화해 1924년 사망했다. 밀레나의 기억에 의하면 카프카는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고,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쓴 작품들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세상이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을 찢고 파괴하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그는 현대 독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옮긴이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카프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LG 연암문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선발되어 독일 루트비히스부르크대학에서 수학했다. 한국카프카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주대학교 명예교수다. 주요 저서로는 ≪카프카 문학의 이해≫(1998), ≪프란츠 카프카≫(2004), 주요 역서로는 ≪실종자≫(2009),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2011)(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카프카와의 대화≫(2013), ≪카프카의 엽서−그리고 네게 편지를 쓴다≫(2017), ≪나의 카프카≫(2018)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의 카프카 연구 50년>(2010), <카프카의 ‘파괴할 수 없는 것’ 연구−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재’와 관련하여>(2013),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베버의 ‘관료제의 지배’ : 카프카의 장편소설 <성>을 중심으로>(2014),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읽기>(2016) 등이 있다. 2018년에 막스 브로트의 ≪나의 카프카≫로 제18회 ‘한독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차례
1장. 화부
2장. 외삼촌
3장. 뉴욕 교외의 별장
4장. 람제스로 가는 길
5장. 옥시덴탈 호텔에서
6장. 로빈슨 사건
7장. 도심에서 떨어진 교외의 길임에
8장. 로빈슨이 “일어나! 일어나!”라고 외쳤다
미완성 부분
브루넬다의 이사
카를은 길모퉁이에서 보았다
그들은 이틀 밤낮으로 기차를 탔다
해설
부록−카프카의 ≪실종자≫ / 김태환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가 가난한 이민자로 상륙했더라면 어디서 살아야만 했을까? 외삼촌의 해박한 이민법에 비추어 볼 때 그는 미국 입국 허가조차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본국으로 송환됐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동정심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점과 관련해 카를이 미국에 대해 읽었던 것이 모두 정확했다. 여기서는 행복한 사람들만이 주위의 걱정 없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자신들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56쪽
카를은 그 하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과거의 복잡한 기억 속에서 그녀는 항상 부엌 찬장 옆에 앉아 그 찬장의 판자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다. 카를이 가끔 아버지를 위해서 물컵을 가지러 가거나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부엌에 들어갈 때면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때로는 그녀가 부엌 찬장 옆에서 이상한 자세로 편지를 쓰다가 카를의 얼굴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그녀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럴 때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가끔 그녀는 부엌 옆에 있는 좁은 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그때 카를은 지나가면서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때 그녀는 부엌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카를이 길을 막으면 마녀처럼 웃으면서 달아나기도 했다. 또 카를이 부엌에 들어와 있던 어떤 때는 부엌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아 카를이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카를이 전혀 갖고 싶지도 않은 물건을 갖고 와서 슬며시 카를의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은 그녀가 “카를!” 하고 부르고서, 뜻밖에 말을 걸어온 데 놀란 카를을, 인상을 찌푸리고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기 방으로 끌고 가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 그의 목을 감쌌다. 그녀는 옷을 벗겨 달라고 졸랐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의 옷을 벗겨서 그를 침대에 눕혔다.
−4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