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플로리앙 젤레르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주는 극작가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아버지>, <아들> 이른바 가족 삼부작을 완성하며 현대사회 가족 문제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그중 <아들>은 2018년 초연되어 몰리에르상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삼부작을 마무리하는 이 작품에서 젤레르는 전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 가족의 불안한 초상을 그린다. <아버지>, <어머니>에선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불안과 혼란이 극 중 시점과 연결되어 독자가 이들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게 했다면, <아들>에선 아들의 내면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왜 불안을 겪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극 중 시점은 아들이 아닌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간다. 자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돌봐 온 부모가 정작 자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이 작품에선 바로 그 문제가 불거진다.
<아들>은 10대 니콜라가 갑작스런 부모 이혼을 겪은 뒤 불안과 우울로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다. 결석, 거짓말 그리고 자해, 니콜라는 부모에게 부지런히 위험 신호를 보낸다. 안느와 피에르도 이혼을 하긴 했지만 아들에게 무심한 부모는 아니었다. 아들의 기분을 살피고, 아들의 고민을 들어주려 하고,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고통스러워하는 아들 니콜라를 지켜보며 피에르는 마지막까지 이 질문들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피에르의 시점을 따라 독자 역시 피에르의 상황과 처지에 놓이게 되고,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보게 된다. 그리고 피에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선 어떤 가정이나 후회도 소용없다는 다소 허무하지만 뼈아픈 결론에 이른다.
<아버지>와 <어머니>에서 주인공의 불안한 내면을 따라 장면을 전개하며 현실과 상상을 뒤섞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형성했던 플로리앙 젤레르는 <아들>에선 아들의 불안을 지켜보는 관찰자 아버지의 시점을 택하며 부자의 ‘관계’를 보여 주는 데 좀 더 집중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 실망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인 아버지의 복잡한 심정은 분명히 드러나는 대신 아들의 마음만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전작에서 가족 구성원 개인의 심리적 속성을 탐구했다면, 이 작품에서 젤레르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가족 ‘관계’의 비극적 속성을 탐구한다. 대다수가 공감할 만한 흔한 가족 갈등을 소재로 반전을 만들어 내며 독자를 격한 슬픔과 회한에 빠트리는 젤레르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아들>은 젤레르의 가장 큰 재능이 바로 감정을 유발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놀라운 작품이다. 현대 가족의 파괴적인 역학에 대한 이 연구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디언즈≫ 리뷰 중에서
200자평
플로리앙 젤레르는 현대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가족 삼부작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중 <아들>은 부모의 갑작스런 이혼 이후 불안과 우울을 겪는 아들을 아버지 시점에서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젤레르는 이 작품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지은이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 1979∼)는 오늘날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신예 소설가다. 2002년에 첫 소설 ≪인공 눈(Neiges artificielles)≫을 발표해 ‘아셰트 문학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문단에 데뷔했다. 2004년 파리 마튀랭 극장에서 첫 희곡 <타인(L’Autre)>을 공연하여 관객들의 환호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이후 불과 10여 년 동안 6편의 소설과 10편의 희곡들 발표했으며, 그중 절반은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연극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것은 일곱 번째 희곡 <아버지(Le Père)>(2012)다. <아버지>는 2014년 브리가디에(Brigadier)상과 몰리에르상 3개 부문을 석권했고, 영국에서 UK 연극상(2015), 이브닝 스탠다드 최고연극상(2015), 로런스 올리비에상(2016), 미국에서 토니 최우수작품상(2015)을 수상했다. 2016년 <아버지>는 이스라엘 연극아카데미 최우수상을 추가로 수상했고, 오늘날 해외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연극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렉스프레스≫는 30대인 플로리앙 젤레르를 동시대 프랑스 최고 극작가로 평가한다. 야스미나 레자, 장뤼크 라가르스, 조엘 폼므라, 플로리앙 젤레르가 주도하는 동시대 프랑스 연극은 과학 기술과 시장 경제의 횡포, 이념의 공백, 일상에 편재한 폭력, 인간관계의 단절과 자기 소외 등 당대의 사회 문제들을 천착하면서 연극 양식의 실험에도 주력해 왔다. 특히 플로리앙 젤레르는 아방가르드극과 풍자희극을 혼합한 포스트모던극 형태로 단조로운 일상생활의 지하 동굴을 탐사하고 있다.
옮긴이
임선옥은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프랑스 파리-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한국예술종학학교 연극원 겸임교수, 서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희곡 문학 및 연극 이론을 강의하며 연극평론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21세기 연극서곡≫, ≪연극, 삶의 기호학≫, ≪동시대 연극비평의 방법론과 실제≫(공저), ≪예술을 쓰고 감동을 읽다≫(공저), 역서로는 프랑스 소설 ≪시인을 꿈꾸는 나무≫, ≪욥의 아내≫, ≪슬픈 천사여 안녕≫, 프랑스 희곡 ≪어머니≫, ≪아들≫,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근간), 논문으로는 <몰리에르 희극의 변장미학>, <몰리에르와 동시대 희극의 대단원 연구>, <장 지로두의 비극에 나타난 운명>, <장 주네의 <하녀들>에 나타난 고전 극작법의 변주>, <장 주네의 <하녀들>, 구조의 발생론적 접근>, <기호학과 연극비평>, <열린 기호학을 활용한 연극비평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아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니콜라: 모르겠어. (사이) 난 뭔가 변하길 바라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그래서 그래.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마…
피에르: 응?
니콜라: 아냐. 아무것도. 잊어버려.
피에르: 아냐, 말해 봐… (망설이는 니콜라) 니콜라, 아빠한테 말해.
니콜라: 아빠하고 살고 싶어.
피에르: (갑자기 마음이 쏠려) 넌… 그러니까…
니콜라: 여기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벗어날 수 있단 걸 알아. 하지만 여기선 아냐. 혼자선 못해. 너무 힘들어…
피에르: 그래, 하지만…
니콜라: 엄마하곤 더 이상 안 통해. 엄만 나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어. 엄만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 난 그걸 알아. 여기에서, 난 너무 어두운 생각을 해. 너무 힘들어. 확실해. 그리고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거 난 알아. 그걸 느껴. 그리고 난 동생하고 살고 싶어…
피에르: (난처해져서) 그래.
-15-16쪽
피에르: (니콜라 말을 자르면서)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한다, 니콜라. 협상불가. 이미 말했지. (사이) 너 왜 그렇게 걱정해? 다 잘될 거야.
니콜라: 모르겠어.
피에르: 여기서 살겠다고 한 건 너야. 아빤 받아들였어. 그게 당연한 거고, 근데 네가 노력을 해야지만 다 잘될 거야. 알겠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어… 빙빙 돌면서. 불안해하면서. 변해야 돼. 그리고 손톱 물어뜯는 거 그만해, 피가 나야 멈출래! (사이. 피에르가 일어선다. 그리고 니콜라 옆에 앉으러 간다. 더 다정하게) 넌 의기소침해 있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야. 땅에 주저앉아… 알겠니? 누구나 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일어날 시간이야.
니콜라: 응.
피에르: 이게 새로운 출발이길 바란다. 그리고 네가 다시 웃기를… 예전에 네가 웃었던 것처럼. (사이) 넌 똑똑한 아이야. 조금만 공부하면, 수업 따라가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을 거야… 아빤 널 믿는다. 언젠가 네가 이 시기를 다시 생각할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넌 생각할 거야…
-27-28쪽
피에르: 이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니콜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빠한테 그걸 말해야 할 때인 것 같지 않니? (사이) 분명히 뭔가 있었어… 아니라면 네가 이런 걸 가지고 있지 않을 거야… 그걸 하지 않을 거야. (사이)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아무 말 안 하면… 아빤 널 도우려고 여기 있다, 니콜라.
니콜라: 말하고 싶지 않아.
사이.
피에르: 어쨌든, 네가 괴로우면, 그걸 흘려버릴 다른 방법들이 있어. 왜 운동을 안 하니? 공원에 달리기하러 가 봐. 우리가 같이 갈 수도 있고, 네가 원하면. 토요일 아침에… 아니면 다른 날이라도! 그런데 그건, 안 되겠다. 알지? (짧은 사이. 피에르는 니콜라의 팔을 잡는다.) 소독할 거 줄게.
니콜라: 아냐… 그냥 긁힌 거야.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