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라카바파의 역류자(逆流者), 아리시마 다케오
아리시마 다케오가 속한 시라카바(白樺)파는 실상, 제국주의 집권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습원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아리시마는 시라카바파의 역류자라 불릴 정도로 하층민에게 깊은 관심을 두었다. 어릴 적부터 금욕적 생활과 강렬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리시마는 미국 유학 시절(1903∼1907)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하층민에게서 ‘본능적 삶’을 발견하고 이에 심취한다. 아리시마의 하층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쾅쾅벌레(かんかん虫)>(1910)를 시작으로 이 책에 수록된 <카인의 후예>(1917), <태어나려는 고뇌>(1918)로 이어지며 한층 깊어진다.
“두려워하지 않고 추(醜)에도 사악(邪惡)에도 부딪혀 보겠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외적인 제약과 사회적 환경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특히 사회적 인습과 선악의 구별을 넘어서서 본능에 자기를 불태우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사랑을 선언하다>의 Y코도 그런 인물이다. 소설은 막역한 친구 사이인 A와 B 사이의 편지로 전개된다. 편지들의 이면에서 사랑의 진실이 물결처럼 일렁이다가 마침내 폭풍우가 되어 몰아친다. 진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세 사람은 이미 세상의 규율과 인습을 벗어던지고 본능적 사랑에 몸을 맡긴 후다. 이제 셋은 완전한 자아 각성의 경지로 나아간다.
국내 처음으로 소개한다.
“지구의 가슴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태어나려는 자” 기모토에 대한 애틋한 찬가
<태어나려는 자>는 실제 화가인 기다 긴지로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작중 화자인 소설가 ‘나’는 아리시마 자신을 연상시킨다. ‘나’는 문학자로서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번민하는 기모토에 대해 가슴 시린 연민과 공감을 품고 있다. ‘나’는 기모토의 하루하루를 상상하며 소설을 써 내려간다. 기모토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생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어부로서의 생활을 이어 간다. 기모토가 목숨을 걸고 폭풍우와 싸우며 물고기를 낚는 장면에서는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기모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다. 예술에 매진하지 못하는 기모토가 부디 예술만을 위해 온전히 살아 주기를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자연에서 바로 막 따온” 본능적 인간, 닌에몬
<카인의 후예>의 주인공 닌에몬은 아리시마가 지향한 ‘본능적 삶’을 온전히 담아 낸 인물이다. 홋카이도의 매서운 겨울날, 닌에몬이 절름발이 아내와 문어 대가리를 닮은 아기, 여윈 말을 끌고 마을에 나타난다. 마을에 정착한 그는 마을의 규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작료를 내지 않는 것은 물론 일정량 이상 농사가 금지된 아마를 제 마음껏 심는다. 광폭한 성격에다 이웃 유부녀와 간통하고 작황이 나쁜 데 대한 화풀이로 이웃집 아이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한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잇따른다. 급기야 마을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자 지주와 소작료를 담판 짓는 것만이 마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닫는다. 그는 마침내 지주의 집을 찾아간다.
200자평
1910년대 시라카바(白樺)파의 대표 작가인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1878∼1923)의 작품 3편을 수록했다. 작가의 대표작 <카인의 후예>와 <태어나려는 고뇌> 외에도 국내 처음으로 소개하는 <사랑을 선언하다>(원제 <선언>)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의 근대문학 형성기에 당시 인기 작가였던 아리시마가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에 대한 논문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아리시마 다케오 연구회가 편찬한 ≪아리시마 다케오 사전(有島武郎事典)≫(勉誠出版, 2010)의 집필에도 참여한 역자 류리수는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책을 번역했다. 또 유려한 필력으로 <카인의 후예>와 <태어나려는 고뇌>의 작중 배경인 홋카이도의 사투리를 우리나라 사투리로 솜씨 있게 번역해 소설의 몰입감을 배가했다.
지은이
1910년대 낙관적 이상주의를 구가했던 ‘시라카바(白樺)파’의 동인으로 기독교와 톨스토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홋카이도의 삿포로 농학교 시절 금욕적 청교도 생활을 실천하며 완벽한 영적 생활을 추구했지만, 더욱 강하게 솟구치는 성욕으로 인해 그의 내면은 영과 육으로 분열되어 갈등하게 된다. 미국 유학 시기, 영육을 모두 긍정하는 휘트먼에 공감하고 크로폿킨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다. 귀국 후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지 못하고 극도의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침내 교회를 탈퇴하고 부모에게 상속받은 홋카이도의 방대한 농장을 소작인에게 나눠 주고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가는 데 매진한다.
아리시마는 시라카바파 중에서도 계급적 모순과 여성의 해방 등 사회 문제에 주목했다. 선과 악, 영과 육을 동등하게 긍정하며 자유인을 지향하고 ‘본능적 삶’을 갈구했다. ‘남녀의 사랑이 절정인 순간에 죽는다’고 했던 아리시마는 1923년 유부녀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 동반 자살한다.
대표작으로 <어떤 여자의 초상(或る女のグリムプス)>(1911∼1913), <선언>(1915), <카인의 후예>(1917), <돌에 짓눌린 잡초(石にひしがれた雑草)>(1918), <어린 것들에게>(1918), <태어나려는 고뇌>(1918), ≪어떤 여자≫(1919) 등이 있다.
옮긴이
류리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공부하면서 20여 년간 일본어, 일본의 문학과 문화를 강의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한국의 근대문학 형성기에 당시 인기 작가였던 아리시마가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에 대해 박사 논문 <아리시마 다케오와 염상섭 문학의 ‘근대적 자아’ 비교 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2004)를 썼다. 이후 그 배경이 되는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으로 삼게 되었다.
신인논문상(한국일어일문학회, 2004), 신인번역가상(새한국문학회, 2005)을 받았고, 200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예계간지 ≪문학과 현실≫에 이어 ≪착각의 시학≫에 꾸준히 일본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밖에 번역서로 ≪어느 멋진 하루≫(원작 ≪신(神樣)≫,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広美), 2009), <한 송이 포도>, <클라라의 출가>(≪일본 명단편선≫, 아리시마 다케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이 있다. 또한 부친(류의석)이 남기신 유고를 기반으로 보완, 수정하여 일본어판 ≪白凡逸志≫(2019)를 출판했다.
차례
사랑을 선언하다
태어나려는 고뇌
카인의 후예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제대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쓰디쓴 술을 단숨에 들이켜는 것과도 같은 쾌감이 있지. 하지만 행복 뒤에 숨겨진 ‘진실’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운명 그 자체를 헤아려 짐작해야 하는 두려움이 느껴진다네. 그런데 히로세가와강 변의 조촐한 자네 집에서는 ‘진실’이 행복이라는 가면을 벗겨 늘어뜨린 채로 미소 짓고 있었네. ‘진실’이 미소 짓는다 − 나는 ‘진실’도 인간들처럼 미소 짓는다는 사실을 자네 집에서 발견했네.
– <사랑을 선언하다> 중에서
기모토 군! 하지만 나는 자네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네와 만났을 때도 자네 같은 사람이 − 도회의 냄새에 완전히 면역되어 과민한 신경이나 과도한 인위적 지식에 구애받지 않는 강건한 의지와 강인한 감정과 자연 속에서 고이 길러진 예지로써 자연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자네 같은 대지의 아들이 − 온전히 예술만을 위해 살아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태어나려는 고뇌> 중에서
농장의 하늘 위까지도 지주의 옹골진 커다란 손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머금은 구름이 숨 막히도록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꺼져!”라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그의 귓속에서 호통쳤다. 어떻게 사는 게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나리가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인간이라면 나리는 인간이 아니다.
–<카인의 후예> 중에서